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류여 시인 / 옹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9.

류여 시인 / 옹이

 

 

소나무 등걸 한가운데

한때 온몸의 신경이 소용돌이치다 굳어졌을 흔적이 있다

 

한 나무가 등을 내밀어 껍질을 이루고 밖으로 튀어나와 척추로 휘어졌을 중심

 

생물의 발뒤꿈치를 보면 안다

발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송곳 같은 신경이 서 있었던, 거기

 

나비도 비가 오면 날개를 접어 팽팽하게 다리를 붙인다

이파리 중심에 매달린다

 

어둠의 촉수를 견디며 일어서는 일

손이 무디어질 때까지 내면을 받아 내는 일

 

나는 늘 빗길에 붙어있었다

젖은 발은 눈물이 보이지 않았다 삐꺽 이는 소리만 등에 젖었다

 

심야에 눈이 붉어진 사람은 보인다

내가 그림자 같을 때

낭떠러지처럼 가늘어질 때

체면이 되어준 철심

 

내 앙다문 이빨 아래턱 한가운데, 갈비뼈 아래, 척추 한가운데, 발바닥을 중심으로

나를 세우고 서 있는

 

분노 반, 눈물 반, 죽음 반이라는 생존의 흔적

내 주저흔

 

월간 『모던포엠』 2021년 11월호 발표

 

 


 

 

류여 시인 / 오래된 소파

 

 

여기 빈집이 있네

내 밖의 내가 여기 있네

나는 밖으로 갇혀버렸네

 

네 엉덩이 밑에 잊혀지는 쓸모가 되었네

슬픔의 시간이 침묵으로 절여져 소음과 함께 오래 남아있으나

이름이 없네

 

나는 풍경도 없이 미동도 없이

네가 내게 몸을 부렸듯이

조용하네

벽과 벽을 방이라 했던

네게 기대어 침묵하네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검은 소파여

내가 없는 곳에 와있는 물체여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며 수많은 물상이 되었는가

 

수평이 되는 고요한 시간 나는 껍질만 남은 가부좌네

 

모든 시간이 지나가 버리고 난 뒤에야

이 껍질을 알아볼까

 

나는 이제 나머지 날들이네

위로가 되지 못한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저녁이 와서 다행이네

 

너는 끝내 내게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물상은 허구네

그러므로 나도 덧없는 허구네

 

바라볼 때만 존재하는 먼지들이

지금,

얼굴과 옷에 붙거나 날거나 춤을 추며

날아오네

 

시간의 모양이 허공의 방향을 가르키네

뭉개진 몸은 공중만을 안고 있네

 

월간 『모던포엠』 2021년 11월호 발표

 

 


 

 

류여 시인 / 한 줄기 빛으로 오는 먼지

 

 

한줄기 햇빛의 틈으로

무수히 떠 있는 먼지를 본다

 

햇빛에 떠 있는 먼지는 이 세상 모든 공간에 떠 있는 것들을 알게 하듯

있다가 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문득 한 줄기 빛으로 오색의 얼굴을 빛내며 떠 있다

 

나는 외롭게

햇빛 아래 우뚝 서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이 세상 모든 아름답고 슬픈 것들은

힘없이 사라지는 향일성인 것을 보라

꽃이며 나무며 여자며 남자며

 

저 소리도 없이 피어나는 것들

빛을 내며 허물어지는 황홀한 유희

그것은 무엇인가

건드리면 꺼질 듯 나풀거리며 떠도는 순수는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숨을 들이쉬면

춤추며 밀려오는 안개의 가루

보이지 않는 꿈, 보이지 않는 사랑

먼지의 다디단 입맛,

 

보아

저 나풀나풀 살아나는 것들

무게도 없이 날으는 생명을 보아

자기만큼의 욕망으로 반짝이다 사라지는 것들

혼도 없이 다만 살아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춤추는 것들

저 무게도 없는 생명을 보아

 

1980년 《전남일보》신춘문예 당선시

 

 


 

류여 시인

전남대학교 대학원 간호학박사 졸업. 1980년 《전남일보》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