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시인 / 한 마리의 고양이로부터
날개를 다 쓰고 누운 고양이가 있다. 주차장 구석에서 모두에게 등을 보이고 누워 빗물에 자신을 적시는 중, 불리는 중, 이동시키는 중. 검은 털을 희게, 흰 털을 더 희게.
투명의 길이 되어가는 것이 어때서요? 물러서지 않는 것이 어때서요? 등에 화살을 꽂고 미워지면 어때서요? 나비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나비인 적 있어요. 동화인 적 있어요. 벽을 밟고 올라 진지하게 굽어본 적 있어요. 한발만 쭉 빼면 바로 떨어질 수 있어요. 아래와 위의 고양이가 될 수 있었어요. 사실적인 고양이로 목격될 수 있고 당신의 담을 탈 수 있으며 당신 등 뒤에서 당신의 길어진 꼬리를 툭 하고 건드려볼 수 있었어요. 아무래도 멀리서부터 왔다는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나는 환상적인 고양이. 24시간 뒤의 고양이. 불 속의 고양이. 줄어드는 고양이. 열이 나요. 창가에 발을 두고 다녀요. 제법 형태를 갖춘 상상의 동물. 기원이 되는 몸이 되겠으니.
빗금 긋고 빗금. 사선 안에 등을 대고 누울까. 큰 짐승이 하나의 돌멩이로 돌아가는 번개같은 순간. 일초는 일초. 뒤축 구긴 신을 신고. 뒷동산이 무너져 더이상 동산을 산책길이라 부를 수 없는데. 다니던 길을 찾을 수 없는데. 그저 무슨 날인지 모르겠는데요. 이 고양이 죽었어요. 내 눈앞에서 줄어듭니다. 한 마리의 고양이로부터 제법 형태를 갖춘 새로운 길을 갑니다.
계간 『시인수첩』 2021년 봄호 발표
김기형 시인 / 계속된 불
모두가 글을 쓰고 있다. 어딘가에서 환영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손바닥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계속하여 걷고 말았을 때. 뒤를 돌면 지워지지 않는 피의 세계가 너무 멀쩡하게 흐르고. 항상 ‘아니오’라고 시작하는 대화. 불처럼 뜨거워서 자신을 못 지우는 대화. 불안해. 불안하게 이러지 마. 오후 여섯 시야. 여섯 시는 지나. 지난다면 좋겠어. 바깥은 열리고 열린 문 뒤에는 열려진 문이 있고 문과 문이 자꾸 길을 내고 있다. 불을 켜고 달리는 네가 보인다. 불을 켜고 머리를 쥐어뜯는 환한 자기의 방식, 자기의 세계. 한 방울만 뚝하고 흘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는 그냥 조금 너를 버린 거야. 말을 듣는 맨발은 차갑다. 여섯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것도, 계속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바라볼 때 나타나는 것이다. 차가운 곳을 주무르며 오는 것이다. 나는 미끄러지고 있어. 잘 되지 않았어. 불안해. 불안한 말이지만, 너는 귀가 크구나. 네 귀는 의자도 바퀴도 명명도 질서와 비바람도 가지고 있다. 나는 귀로부터 시작해. 이것을 귀라고 부르니? 내가 앉은 곳이 문과 문 사이, 비로소 네가 잠이 드는 곳. 작게 말할게. 그래 작게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 영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나의 장면이 형성되고. 잘 보면 숙인 것이 아니라 일어서고 있는 것 같고. 불안하다고 한 말 속에 굴러다니는 돌들을 함부로 치우지도 못해, 네 발뒤꿈치에 대준다. 밟고 오는 것이 좋으니까. 훅 굴러떨어지는 모양처럼 발의 각도를 세워 기대는 것이다. 얼마나 궁금한가.
오셨어요, 드셨어요, 잠은요, 밤은요, 한참 전에 만들어진 몸은요, 이 기대는요.
모두가 글을 쓸 리가 없잖아. 서로의 반이 되는 입구와 출구는 마주보고 서서.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발표
김기형 시인 / 9월생
가늘게 자란 열 개의 손가락을 꺼내 보여요 탁자 위에 나타난 징조
가을에 떨어지는 열매들은 마른 소리를 낸다고 하던데요 화관을 만들기 위해서 붉은 코를 가진 용감한 나의 개 메리언의 얼굴을 보고 있어요 우리는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났어요
불쑥 다른 손이 나타난다 하고 주문을 걸어요 같이 가보려고 새 옷을 꺼내 입고 밤이면 떠도는 빛을 전령이라고 믿기 시작했으니까요
마음속에 쓰러진 나무 세울 수가 없어서 몇 바퀴를 돌고 있어요 눈을 감고 돌아요 메리언의 털이 가끔 나를 스치고 우리는 여기서 태어났지 하는 거예요 나타나고 사라지고 숲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숲을 상상하면서 기적을 배워요 바람이 불면 한꺼번에 떨고 자기 몸을 달래는 목소리들
한 걸음을 떼서 숲으로 더 가까이 가자 너의 무덤을 지어줄게 메리언의 목을 당겨서 일으켜요 내 몸에서도 한낮이 뛰어내리게 될까요
스스로를 깨닫고 나면, 거기 나라는 여인이 있고*
이제 어디서부터 이 숲으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나는 조용히 흔들릴 거예요
* 페르난두 페소아
월간 『현대문학』 2017년 4월호 발표
김기형 시인 / 높은 목소리
빛으로부터 왔어요 무너뜨리면서 왔어요 높은 목소리, 떠오르려는 몸을 대신해 나를 흘려보내요 동전소리 나고요 먹히는 소리 들리고요 젖은 옷도 있어요 둘둘 말아 옷 무덤을 쌓고요 눈 못 뜨는 때까지 퉁퉁 불다가 기울어져요 나를 밟고 오세요 와와 하고 쏟아져서 구멍을 다 열어도 못 들어갈 만큼, 큰 몸 되어 오세요 자기의 집인 줄 알며 오세요 잔가지를 부러뜨려 매끄러운 속살 보여줄게요 당신이 알아볼 때까지 모든 이름을 불러줄게요 손에 손을 잡고 빗줄기처럼 몰려다니는 당신의 발에 신을 신겨줄게요 당신이 온다면 당신이 손가락을 확 열고 기지개를 켠다면 발도 팔도 자기 살처럼 알아서 이제로부터 영원히 나타난다면 높은 목소리 우리가 들떠 듣는 빛 된 목소리 사선으로 얼굴을 난도질하는 수천 겹의 목소리로 우리, 말을 나눠가져요 그 말은 여기에 적혀요 나는 너의 큰불이다 사방을 두루 다닌 당신이, 계단도 없는 지하를 열어요
시집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문학동네, 2021) 중에서
김기형 시인 / 손의 에세이
손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굿모닝 굿모닝
손에게 손을 주거나 다른 것을 주지 말아야 한다 손을 없게 하자 침묵의 완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서 어느 순간 손을 높이, 높이 던지겠다
손이 손이 아닌 채로 돌아와 주면 좋을 일 손이 손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면 좋을 것이다 굿모닝 굿모닝
각오가 필요하다 '나에게 손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나는 아직 손을 예찬하고 나는 아직도 여전히 손을 사랑하고 있다 손의 지시와 손의 의지에 의존하여 손과 함께 가고 있다 손과 함께 머문곳이 많다 사실이다 나는 손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제발 손이여'라고 부르고 있다 '제발 손이여 너의 감각을 내게 다오, 너의 중간과 끝, 뭉뚝한 말들을 나에게 소리치게 해 다오'라고 외친다 손이 더 빠르게 가서 말할 때, 나는 손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손의 탈출은 없다
다만 손들이 떨어진 골목을 찾고 있다 해안가에 앉아 손도 없고 목도 없는 생물들에게서 그들의 뱃가죽을 보면서 골목을 뒤진다! 손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손은 쉬지 않는다 손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은 자신이 팔딱거리는 물고기보다 훨씬 더 생동하고 멀리간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손이 말하는 불필요, 손이 가지려 하지 않는 얼굴
손은 얼굴을 때린다 친다 부순다 허물기 위해서 진흙을 바른다 손은 으깰 수 있다 손은 먼 곳으로 던질 힘이 있다 손이 손을 부른다 손이 나타나면 눈을 뜨고 얼굴들이 모두 눈을 감고 손에게 고분하다 손에 게 말하지 않고 손의 이야길 기다린다 손은 다른 침묵을 가진다
손의 얼개가 거미줄처럼 거미줄과 거미줄 그리고 또 다른 거미줄이 모여든 것처럼 내빼지 못할 통로를 연다 손 사이에서 망각한다 손 안에서 정신을 잃는다 손의 춤을 본다 그 춤을 보면서 죽어 갈 것이다 스러져 가는 얼굴들이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손에게 조각이 난다 손을 감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울었지만 동그랗게 몸을 만 손이 어떤 불을 피우는지, 무엇을 터트리려고 굳세어지는지 이 공포 속에서 손에 대한 복종으로 계속 심장이 뛰다고 말한다
손을 놓고 가만히
탁자 앞으로 돌아온다 손이 응시한다 손이 그대로 있겠다고 한다 손이 뒤를 본다 손을 뗀다 반짝하고 떨어진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용만 시인 / 꽃산 아래 외 1편 (0) | 2022.08.23 |
---|---|
김영 시인(완도) / 낙화 외 1편 (0) | 2022.08.22 |
오주리 시인 / 카라, 눈물에 피어난 외 1편 (0) | 2022.08.22 |
신두호 시인 / 여론의 기억 외 1편 (0) | 2022.08.22 |
배수연 시인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0) | 2022.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