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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기석 시인 / 지하철 키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6.

함기석 시인 / 지하철 키스

 

 

흔들리는 손잡이 함께 잡은 해마 커플

코를 맞대고 웃다가

 

덜컹, 긴 목을 꽈배기처럼 비틀어

입술 포개는데

 

드르륵, 옆 칸이 열리고

헤엄쳐 온다, 귤빛 등줄기가 아름다운 물고기

 

지느러미 흔들 때마다

빛, 빛, 불빛에

 

아가미 방긋거릴 때마다

빛, 빛, 눈빛에

 

키스는 톡톡, 비늘은 반짝

핸드백에서 착한 바다를 꺼내는 기분으로

 

키스는 톡톡, 비늘은 반짝

파도치는 지하철 안, 얼굴 바꿔 마주앉은 사람들

 

해마처럼 문어처럼 말미잘처럼 웃을 때

키스는 톡톡, 비늘은 반짝

 

오후 3시도 나도 긴 코를 맞대고 웃다가

키스는 덜컹, 웃음은 드르륵

 

월간 『현대시』 2021년 3월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월요일 밤 지하철역 19번 승강장

 

 

그는 내 앞에 서서

해군 마크가 찍힌 군용 의료가방을 들고

하얀 부사관 정복에 모자를 쓰고

왼손에 찬 시계를 보았다

초조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짙은 눈썹에 검정색 뿔테 안경을 썼고

몹시 불안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

입술은 말라서 갈라졌다

그가 입술을 오물거릴 때

승강장 왼편의 컴컴한 통로를 타고

철걱철걱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또 시계를 쳐다보고는

승강장 뒤편 에스컬레이터 계단 쪽을

몇 번이나 두리번두리번

누군가를 무언가를 자꾸 확인했다

그때 그의 명찰이 보였다

미 해군 소속 포비아(phobia) 중사였다

지하철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불안하게 떨었고

그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는

독수리와 닻 마크가 찍힌 가방을 꽉 움켜쥐더니

철로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이다 지하철은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깜작 놀라 눈을 감았다

몇 초 후 깊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철로 안에는 검푸른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바닥에 깔린 두 줄기 철로 위로

색색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불가사리와 홍합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방금 지하철이 쌩 빠져나간

오른편 통로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햇빛이 환하게 내리는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다

회색 군용 의료가방은 뚜껑이 열린 채

감염된 구름 위에 놓여 있고

중사는 노년의 여자 환자와 해안선을 걷고 있다

그때 빈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휘청거리며 지하철 안전선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주저앉아 바튼 숨을 고르는데

왼편 어두운 통로에서 재차 순환선 지하철이 달려왔다

가까워질수록 철걱거리는 숨소리는 커졌고

내 심장소리도 거칠어졌다

해안선 끝 가파른 절벽 밑에서

포비아 중사가 힐끔 나를 뒤돌아보았다

 

월간 『현대시』 2022년 2월호 발표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국어선생은 달팽이』(세계사, 1998)와 『착란의 돌』(천년의시작, 2002), 『뽈랑공원』(랜덤하우스, 2008), 『오렌지기하학』(문학동네, 2012),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민음사, 2015)와 동화 『상상력 학교』(대교출판, 2007) 등이 있음. 2006년 눈높이아동문학상,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2013년 제8회 이형기문학상, 2020년 제13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