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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희준 시인 / 습하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6.

김희준 시인 / 습하다

 

 

긁는다 사타구니를 벅벅 등을 벅벅 마른 다리에 큰 발을 가진 아버지의 실직을 모른 척한다

 

어두운 방 서로의 꼬리를 긁어주다가 내 꼬리는 언제 잘렸을까 근원을 더듬는 곳에서 파생하는 묵시록 파스를 붙이려 엉덩이 드러낸 아버지를 철썩 때리다가

 

후레자식이 된다 꼬리를 숨긴 채 하수구로 들어가는 아버지, 아늑한 방 한 칸 쥐가 새끼를 까고 야윈 울음이 모서리마다 생겨날 때 습관적으로 긁는다

 

쥐뿔도 없잖아요

 

이마에 월요일을 새긴다 꼬리를 밟다가 넘어진다 그리하여도 태생이 사족보행이었던 거라고 내 발이 자라 바닥을 잠식해도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고

 

모든 것을 티내지 않기로 한다 절름거리는 10월은 눈감고 살기 적당한 계절 바람직한 날에 아버지는 아버지를 삼킨다 물기 빠진 아버지가 펴지질 않는다 척추를 휘감는 꼬리가 모태를 거스른다

 

애야 등을 좀 긁어다오, 아버지가 게워내는 쥐는 금방 사라진다 흔적을 남기는 건 꼬리와 꼬리에 달라붙은 나

 

팽창된 밤이 우글거린다 다 쓴 파스를 모서리에 붙인다 쾨쾨한 서로를 만진다 뿔이 난다면 좋겠어 저 밤을 다 찔러버리게

 

가로등에 빨린 어둠이 경쾌한 요일을 밝힌다 달력을 넘겨도 달리지 못하는 아버지 복기되지 않는 즐거운 심장

 

습습한 손가락으로 네 꼬리 내 꼬리 말이 아니구나 난 그게 어둠의 여백 같아요

 

아버지를 요약하자면 물먹은 습자지 손바닥만한 햇볕과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하루 캄캄한 곳의 내장 쳇바퀴에서 허기를 채운다 네 꼴 좀 봐라 습한 바닥에 붙은 저 꼬리 좀 봐라 마지막 실업 급여를 받고 네 달쯤 지난, 긴 꼬리에 여전히 목을 단 키우던 햄스터가 제 새끼를 삼킨 지 오래

 

우린 병에 걸리기 적당한 성체를 가졌지 길어지기만 하는 것이 어둠뿐이 아니란다 습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

 

습습- 숨을 내쉴 때마다 길어지는 꼬리, 잘린 부분마다 긁어대는 끔찍한 반복

 

 


 

 

김희준 시인 / 인디고 비행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크레파스를 사오셨다

 

다음날 학교에서 손등을 맞았다 도화지에 30장의 내가 크레파스를 든 채 울고 있었다

 

누구는 추상적으로 누구는 피상적으로 내 울음을 그렸다

 

오후가 사실적이었으나 내가 가진 색은 섞이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았다

 

나비와 아버지를 더이상 그릴 수 없었다 그들은 평면적이었으므로

 

마당에 핀 수국이 파랗게 컸다 크레파스가 색을 담아내려다 부러졌다

 

아버지 손은 파랑이었다 안방에는 바닷물이 출렁였고,

 

물의 혈관이 만져졌다 질감이 거칠다가 따뜻하다가 구도 없는 그림이 역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의 언어를 이해한 자가 살갗을 만질 수 있다는데 뜻을 잘못 해석하여 호된 물질을 당했다

 

이른 아침에 떠난 파도는 중력이 없다 눈치 없는 게가 옆으로 저미는 바람을 맞다가

 

기울게 세상을 읽어낸다 나비가 입체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김희준 시인 / 연필

 

 

장면을 스케치한다는 건 문구점에서 연필을 슬쩍하는 것만큼 스릴 있다는 얘기지

 

가령 실직당한 아빠를 공원에서 마주칠 때의 동공이라거나 내가 사실 세탁소 아저씨의 딸이라 말하는 엄마의 성대라거나 길에서 여자에게 뺨을 맞는 오빠를 본다거나 그 여자와 같은 산부인과를 공유하는 언니가 비밀이라며 나에게 5백 원을 쥐어주는 사실을 연필로 그리는 순간들 말이야

 

둘러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비어버린 가족과 허기진 소통을 나누어 먹지

 

그러면 나는 부러진 연필을 깎고 쓰다 만 일기에 동그라미를 그려넣었어 최대한 둥글게 색을 칠하고 완성된 일기를 북북 찢었지 기겁하는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우리는 콩가루야 삼류도 못 돼 바람 부는 날 콩처럼 굴러가버릴 거야 저 밑으로 더 밑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이 말 많다 하지 마 공부는 연필이 알아서 하거든 지금 내가 그린 우리 가족처럼 말이야

 

연필 밑으로 스케치된 풍경이 어그러지고 나는 연필을 깎고 닳은 연필을 보다가 문구점으로 향하지

 

오늘은 어떤 순간을 그려볼까 고민하여 연필을 슬쩍하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말인데 문구점에서 전화가 와도 그 아줌마를 믿지 않았으면 해

 

 


 

김희준 시인

1994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1994. 9. 10~2020. 7. 24)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중(현대문학전공)이었음.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 창작준비지원금 수혜. 유고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202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