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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미애 시인 / 외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6.

신미애 시인 / 외출

 

 

가지런히 봉분들이 모여 사는 곳

땅의 기운이 따뜻해지고 이마 위로 햇살이 눈부시면

산을 내려간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고요를 흔드는 목소리

죽음이 눈을 뜬다

지상에서 사라진 이름이 외출하는 날

오래전 말라붙은 슬픔은 상석에 진설되지 않고

손자의 웃음이 수북이 올라간다

마을에서 들고 온 안부가 넙죽 절을 올린다

술 한 잔 권하면

소멸의 목록을 빠져나와 기억의 회랑으로 불려나가고

동그랗게 둘러앉은 대화에 한자리 차지하는 고인들

아득한 시간이 성큼 다가와 꽃처럼 열리고

겹겹이 웃음을 입는다

그동안 자란 텁수룩한 머리를 자른 무덤

모처럼 산뜻한 외출이다

 

 


 

 

신미애 시인 / 피아노와 대화하는 방식

 

 

건반은 악기의 성대,

피아노가 목을 풀고 있어요

간질간질 라일락을 만지는 소리가 섞여있어요

옆집 소녀가 손가락으로 말을 걸어요

내 생각은 건반을 따라가며 흑과 백으로 확장되지요

높낮이로 결정되는 악기의 감정이

내 귓속으로 뛰어들면 단단한 아침이 금세 말랑해져요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계란프라이가 익어가고

늦잠 자는 당신의 볼에 입을 맞출 수도 있어요

나팔꽃 덩굴을 한 바퀴 둘러보고

맨드라미 모가지를 스치며 걸어오는 소리

슬픔의 질량이 줄어들어요

창문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소리들이 잎사귀에 떨어져요

흘러내리는 소리들을 기억의 서랍에 보관해두지요

오늘 아침밥상에 젓가락행진곡을 버무려 올려놓으면

장조의 음표들이 아삭아삭 씹혀요

소녀는 악기에게 말을 걸고

소리는 나팔꽃에게 전달되고 꽃은 나와 합쳐져요

이것은 피아노가, 세수를 마친 아침과

재미있게 대화하는 방식이에요

 

 


 

 

신미애 시인 / 소문이 만든 사람

 

 

한 사람을 해부하며 대화가 점화된다 혀와 혀가 과열되고 불이 붙는다 지난시간까지 합산되고 입이 주술을 부리는 동안 말꼬리 붙잡은 말들이 우거진다 곁길로 새지 않는 저 집중력, 여기저기 쏟아진 기억이 조립되고 상상력은 확대되어 누군가는 엉덩이에 뿔을 붙이고 누군가는 이마 위에 뿔을 심는다 가시 돋친 낱말과 그럴듯한 수식어, 테이블에 쌓인 말의 쪼가리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궁금한 귀를 불러들인다 심심한 입술이 내뱉은 실감나는 언어들이 어긋난 뼈대와 군살을 붙이고 인물이 제작된다 즉석에서 괴물 하나 태어난다

 

 


 

신미애 시인

1962년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영문과 졸업. 2012년 계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식물의 체온.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