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 시인 / 목련 신발
목련 나무 아래를 지나가면 희끗희끗 어른거리는 것 그 사람이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하얀 발목이 보이는 것 같은 복숭아뼈가 도드라진 사람의 발등이 보이는 것 같은
너무 환해서 그 아래에 가면 그늘이 없는 것 같은 그 사람이 세 들어 살던 목련 나무는 신발을 조등처럼 매달았다
객사한 아버지 누워계시고 관 위로 목련꽃 뚝뚝 떨어지고 그 나무 아래 지나갈 때면 하얀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 같은
그 신발 속에서 꽃 사태 지고 꽃비 쏟아질 것 같은 봄날 자꾸 신발 뒤축이 목련 나무쪽으로 기운다
이은 시인 / 이쁜 짓 할래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 손목에서 흐르는 피의 색감으로 아빠의 얼굴을 그렸어요
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소환한 날이었죠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였지요 핏발이 오른 아빠가 너 죽을래 하고 면도칼을 내밀었어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목을 그었어요
동생은 이어폰을 끼고 열공 중이었고요 엄마는 넌 죽어도 싸! 입을 꾹 다물었지요 나는 피가 흐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손목에서 선홍색 과육처럼 흘러내리는 피 달콤하고 선뜻한 감촉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친구는 아빠한테 골프채로 맞았다잖아요 그것보다 내 손으로 손목을 긋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반장이 칠판 구석에 ‘오늘의 할 일’이라고 썼죠 우리는 다 같이 이쁜 짓! 하고 외쳤죠 오늘은 이쁜 짓 하는 날
얼굴에서 손목이 돋아나왔어요 손목을 꺾어 화분에다 심을까요 보랏빛 나팔꽃 넝쿨손 내밀고 줄 타고 올라갈 수 있을까요 꿈은 멀어졌는데
우리 이쁜 짓 할래? 머리를 빗어내리면서 너 죽을래
이은 시인 / 태어나지 않은 집
물이 끓고 있었고 방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고 저 하얀 물을 건너가려고
나는 얼굴 없는 시간 속에 깊숙이 잠겨있었고 그곳은 물의 집이었고
또 계집애야? 치워버려!
꿈인 듯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미세한 떨림, 미세한 숨결이 다리로 전해졌고
나도 모르게 나는 하나의 물방울로 까만 꽃씨로 하얀 꽃으로 물의 자궁을 떠다니는 익사체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아득한 어느 시간의 밖에서 문득, 물의 기척을 느꼈고 물 위를 잠방잠방 건너오는 한 아이의 다리를 보았고 겁에 질린 아이의 늘어뜨린 팔을 보았고
문밖에서 누군가 아직도 살아 움직여 하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다시 물속을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고 빽빽한 실핏줄의 그물에 뒤엉켰던 어느 꿈속처럼 물 위로 떠올랐고 허공에서 뜨거운 물이 확 쏟아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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