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한달 시인 / 살 만한 이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6.

박한달 시인 / 살 만한 이유

 

 

옆구리를 빼앗겼다

방어는 하지 않는다

눈 내리는 것으로 막지 못한다

술잔 잡는 것은 일어서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번번이 일어선다

잊힌 서류에 함께 이름 올랐었다고

따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일어섰고

서류도 없다는 사람은 그보다 먼저 일어섰다

앞에 슬쩍 밀어준 낙지다리 하나가 원인이지 싶다

오랫동안 무거웠고 깊이 스며들었기에

땀 냄새 꼬깃꼬깃 배어든다

자란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아무도 자라지 않은 땅

흐린 눈을 밝히는 3W짜리 백열등을

서로의 지갑 속에 꽂아 주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허공에 그린 덫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걸릴 리 없다

지붕 아래 모인 기둥들이 벽을 만들고 집이 되어 간다

심장에 세운 집이다

 

 


 

 

박한달 시인 / 새벽이면

 

 

기도는

가장 깊게 은폐된 태양 건너편에서 길어낸 여명

밤새 부서져 내린 류머티즘을 앓고

북천으로 장삼을 뿌리는 승무

 

들끓는 것 모두

잠재운 후 외치는 소리

 

문 열어라

대문 열어라

첫 새벽에 열어야 복 들어온다

하얀 아침 어김없다

훠이 훠이

 

폭우 쏟아지는 날에도

청춘이 심장 거머쥐며 쓰러질 때도

세월 견디며 천형을 지고도

정화수 정갈한 물빛은

아들 보듬고 온기 없는 방을 지킨다

 

가슴 벅찬 날에도 웃지 못하고

슬픔 틀어막다 짓물러진 석양 넘어갈 때면

거북등 같은 손으로

아들 가만 끌어안는 것이

기도가 되었다

 

빈손으로 거칠어져가는 아들 쓰다듬으며

다행이다 다행이다

수액 말라 바삭거리는 나뭇가지

 

 


 

 

박한달 시인 / 소금장수

 

 

고요한 마을은 들떴다

 

주막의 청사초롱은 먹구름에 가려지는 달처럼 쉽게 꺼졌고

김매는 동안 밭둑에 매어놓을 아이 하나 없이

가버린 낭군 원망하던 젊은 아낙의 문고리도 열렸다

 

닫아도 무서운 방문이었고

제비까지 날아가 버릴 땐 대문 밖

감나무 기둥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일 년에 두어 번 오는 소금장수는 여기저기 간만 맞추고 사라지는 소금이고 뱃속 씨는 염전 소금 결정처럼 자랐다

 

“당신 떠난 자리 씨 하나 자라고 있어요. 홍시가 입에 떨어지듯 당신이 왔지만, 씨에 목구멍이 막힐 줄 모르고 받아먹었네요. 꺽꺽 토하지 못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재회는 짧은 만남, 키울 수 있는 건 소금꽃뿐이라며 웃음을 뱉는 소금장수, 굴곡진 삶을 핑계 삼아 야반도주하는 발 미끄러진 곳 소금쟁이소(沼)*

 

장록 뿌리 먹지 못한 아낙은 장맛비 세찬 날 마지막으로 울었다

공기 한번 들이키지 못한 아이와 함께,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아래 작은 소(沼)

 

 


 

박한달 시인

1965년 경남 함양 출생.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9년 계간 《시현실》 등단, 지리산문학회장. 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