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정일 시인 / 기억에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7.

권정일 시인 / 기억에게

 

 

내 기억에게 그 애는 앵무새다 아바타다 -ing다 미래다

 

새장을 갖고 싶은 일곱 살이고

동의와 허락을 구하던 여름의 중심에서

한 살 더 먹기 전 12월, 그 끝에서 죽은 계절들이다

 

시간 밖에서도 알아보고 마주보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할 때

벨을 누르고 목도리를 턱까지 고쳐 두르고 출구로 걸어가는 변하지 않는 동작들

 

벚꽃은 벚나무에서만 피고

벚나무에서 매번 벚꽃이 피었다는 사실

 

소란하고 사소하고

같으면서 조금씩 다른

 

아마도 그 목도리는 더 따뜻했겠지 속눈썹은 길었을 테고 구두 굽은 높았을 테고 신발 끈이 풀렸을 테고, 몸무게는?

 

기억이 그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애는 오래된 주소이고 아직 도달하지 않은 편지이며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꾸려진 여행 가방이니까

 

기억의 맛이 미온적일 때, 구두를 신겨주며 내미는 훼미리주스처럼 그 애가 온다

무리지어 오지 않는다 기념하지 않으며 온다 천천히 온다

 

어제는 그만

새장 문을 열어 두고 외출했던 거야

그래도 잘 자라줘서 고마워 그 애를 위해

 

굿모닝,

서둘러 아직도 돌아오고 있다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2년 3월호 발표

 

 


 

 

권정일 시인 / 나나니벌은 나나니벌이 되어요

 

 

나나니벌은 땅에 구멍을 파고 다른 곤충의 애벌레를 물어와

마취 침을 꽂아 기절시킨 뒤 애벌레가 발버둥치지 못할 만큼만

살려놓고 애벌레의 몸속에 알을 낳는다.(곤충도감)

 

 

나나니벌은 땅벌이에요 손가락마디 하나만큼 길쭉해요

 

주로 혼자라는 것과

집을 지은 흔적이 남지 않게 흙을 갖다 버리는

깔끔한 미장이라는 것과

그러고 나서 사냥을 나가는 것과

은밀하고 고독하고 치밀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알을 낳기 위해 사냥한 나방애벌레를

미친 듯이 내리쬐는 햇볕 속을 뻘뻘 기어

모셔오듯, 파놓은 굴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팔월이에요,

요즘 나는 아기집과 알집을 자주 생각하게 돼요

 

나방애벌레 뱃속에 알을 낳고나면 자신의 알을 위해 어디론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나나니벌

나나나나 날갯짓이‘나 닮아라, 나 닮아라,’처럼 들려 나나니벌이 되었다는데

 

어디론가 날아간 그 어딘가가 내방 처마 끝,

나나나 나나니 나나나니 울어 댑니다

‘나 닮지 마라, 나 닮지 마라, 아가야, 아가야,’내 귀에는 왜 이렇게 들릴까요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처럼

 

나는 미역국을 끓입니다

 

부화한 나나니애벌레는 살아 있는 나방애벌레를 먹겠죠?

그리고 나나니벌이 되겠죠?

나나니벌이 된 나나니벌은 그렇게 또 여름을 완성하겠지만 그러나 여름을 위한 그 여름의 대단원은 아름답지만은 않을 거예요

 

어제는 어제의 나나니벌이었고 나였고

오늘은 오늘의 나나니벌이고 나인데

 

나나니벌과 나는 계속될 거 같아요

 

반년간 『상상인』 2021년 창간호 발표

 

 


 

권정일 시인

1961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2003년에는 국제사화집 『숲은 길을 열고』 발간. 시집으로 『마지막 주유소』와 『수상한 비행법』, 『양들의 저녁이 왔다』와  산문집 『치유의 음악』이 있음. 2009년 부산 작가상 수상. 2011년 제1회 김구용 문학상, 2019년 제39회 이주홍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