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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숙 시인 /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 위해서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7.

이문숙 시인 /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 위해서

 

 

넘어져서 무릎을 다치고 난 뒤

무릎을 편애하기 시작했다

 

무릇 무릎이라 하면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픈 무릎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무르팍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불쑥 솟아난 돌의 미간

서걱거리는 잎을 달고 꼼짝 않고 서 있던

마가목 나동그라진다

나는 엎어져서 깨진 무릎을 들여다본다

 

찌륵거리며 건너온다

그만 저곳으로 갔던 게 아니다

아직 마가목은 파르스름 흠칠대는 기류를 흘려보내고 있다

귀뚜라미 수염 같은

가슬가슬한

귀뚫이의

 

마가목 가지는 하나도

헐거워지지 않았다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철제 난간에 저를 뻗어

걸치고 있다

 

무릎이 무릇 무르팍이 되기까지

콱 힘주어 일어서기까지

 

 


 

 

이문숙 시인 / 사십오분의

 

 

무료한 것도 같아 졸린 듯도 해 눈을 감고 있으면 좋은 것도 같아 갑자기 할당된 이 시간을 뭐라 해야 하나 바니따스*, 해골 속에 꽃을 꽂을 수도 있어 용과 통정하여 아이를 낳을 수도 있어

 

사막의 별을 부르듯, 터번을 두른 자들이 느릿느릿 낙타를 타고 가면서, 고독 끝에 저절로 새어나오는 노래처럼, 낙타방울은 별들을 찔러대고, 어쩌면 돌이 되어 불멸을 다짐할 수 있는 이 시간

 

고래가 아이를 유괴하여 물속에 데려갈 수도 있어 고장 난 수도꼭지가 물을 뿜어도 하루종일 신고도 없이 입을 다물 수도 있어 진흙탕에서 맨발로 뛰어다닐 수도 있고 형광등을 깨고 도망칠 수도 있어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 일과가 일찍 끝나버린, 갑자기 셔터가 툭 떨어지고 양귀비 씨가 터지고 어쩌면 아편을 할 수도 있고 비행기가 추락할 수도 있고 독 묻은 칼에 맞을 수도 있는 이 시간

 

사십오분의 허방 속에서도 심장이 벌떡거리고 혀가 말라붙는다는군 손은 서류를 찾고 모니터를 켠다는군 뒤집어놓은 서랍 속 여우야 여우야 뭐 하냐 서랍 틈으로 번지는 억지눈물 같은 황혼이라고 보고 있냐 반찬은 무슨 반찬

 

 


 

 

이문숙 시인 / 악어 쇼

 

 

아무도 없는데 돌아보니

악어 한 마리 입을 벌리고 있어

 

빨간 타이츠를 입은 소녀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주먹을 만들어

벌린 입속으로 집어넣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불을 한입 달게 먹고는

또다시 울퉁불퉁한 이빨 사이로 넣어

 

무릎을 꿇고 천천히 윗몸을 들어올려

잘 휘어진 등 아래로

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다가

머리를 악어의 커다란 주둥이 사이로

 

나도 그 속으로 펜을 쥔 주먹을 넣었다 뺀다

(주먹은 잘라지지 않고)

나도 매일 부글거리는 머리를 넣었다 뺀다

(머리는 동강나지 않고)

 

악어가 입을 다물어 이빨들이 맞물리지 않는 한

악어 쇼는 계속되리라

 

포만한 악어는 절대 사냥감을 찾지 않는다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닫아주기 전에는

 

 


 

 

이문숙 시인 / 이상한 호수-가루

 

 

절벽 위 검은 바위틈

이따금 돌가루가 소리없이 흘러내려요

내딛는 짐승의 완강한 발도 없는데

 

갑자기 일을 하다 멈추고 돌아보면

깜짝 놀라 절벽을 바라보면

 

저기 절벽 너머 한 여자가 있어요

발치에 고무다라이 하나를 놓고

붉은 해의 다라이를 놓고

아무 말도 안하고

아무,

 

뒤엎어진

간의 콩팥의 쓸개의 허파의 붉은 핏물도 다 빠진

 

절벽 너머 여자는 울지도 못하고

입을 틀어막고 희끗희끗한 창자를 줄줄이

다시 담으려

 

이 시간의 단속반원

절벽 아래 집 절벽 아래 학교 절벽 아래 절벽 아래

줄줄이 흰 창자가

 

돌아보면

저 혼자 질겁해 추락하는

돌이 가루가 되는 이 아뜩한 시간

 

스르르 미끄러진

돌가루들이 그 아래 곱게 쌓여 있는 이

시간

 

 


 

 

이문숙 시인 / 책상 아래 벗어놓은 신을 바라봄

 

 

책상 아래 벗어놓은 신을 바라봄

골목에 불 꺼진 마지막 집을 바라볼 때처럼

 

열넷에 어머니가 물속으로 사라진

그는 왜 ‘신(神)은 없다’라는 그림에

여자 구두

아니, 여자의 신 한짝을 그려넣었을까

 

책상 아래 벗어놓은 신을 말없이 바라봄

어느 먼 곳에 신이 손톱으로 파놓았다는 호수

신이 아픈 이빨을 던져 생겼다는 봉우리를 바라보듯

 

골목의 끝에는 ‘화수목’이라는 구잇집

뚝딱뚝딱 수리를 해놓고 개업 한 주일도 못되어서

문을 닫았네

 

시멘트 반죽을 부어놓은 보수중인 길,

그 위에 마구 발자국을 찍어넣는

금치산자처럼

 

책상 아래 놓인 신을 말없이 바라봄

신의 분실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어느 유명음식점

신을 정리하는 일만 맡은 종업원처럼

 

책상 아래 벗어놓은 신을 바라봄

먼 기류에 먼저 닿아 있는 펼쳐진 맹금류

날개의

 

 


 

이문숙 시인

1958년 경기도 금촌에서 출생. 1991년 《현대시학》 에 <천마표 시멘트> 외에 10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