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 시인 / 이상한 결핍
너와 나와 누구와 혼자와 이미지가 없는 그림자를 부른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고흐의 아몬드나무를 바라봤다 우리는 껴안을 시간이 충분했고 글씨로 사랑을 나눴다 마지못해 앉아 있는 자세로 입안의 사탕을 나눠 물었다
커피는 충분했고, 고양이는 꼬리를 곧게 세웠고, 염치없는 살아있는 것들을 향해 개새끼라고 말해줬다 우리는 독일어로 욕을 했고, 버릇처럼 타인을 타박했고, 우리가 아닌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묽은 눈으로 중오하는 삶, 붉게 인쇄된 이야기
폭설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바람에 날리는 솜사탕 손으로 뜯어먹으며 울었다 영혼은 흐르고, 흘러서, 다시 여기 와 있고, 수상한 움직임으로 키스한다 다시 리듬을 찾아야 해 낭자한 꿈을 꿔야 해 너를 안았는데도 몰려오는 한기 바들바들 떨며 속삭인다 사랑해
변명은 많고, 두둔할 것도 많다 레몬즘을 짜며 그것들을 고민한다 어떻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 널브러진 브래지어를 주워 들고 비누로 박박 씻었다 거기에는, 잘못 산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사랑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2018년 3월호
김하늘 시인 / 장마
맑은 것들만 사랑할 때가 내게도 있었어 빛나는 알전구나 부드러운 새끼 고양이의 털 너의 봉긋한 가슴 같은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걸 세상이 예뻤고, 내가 예뻤어 뭔가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쉬웠었지 너의 생각에 감탄하는 것도 너의 기억에 작은 뿌리를 내린 내가 기특했어 너의 심장박동 수를 세는 일이나 허공에 질주하는 마음까지도 근사해 보였으니까
긴 장마가 시작되던 해에 빵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널 기다렸어 손톱을 깎고, 눈 화장을 하고, 높은 구두도 샀지 네가 사라질 거라고, 한 점 의심도 못 하고 떠돌이 개처럼 너를 기다렸어 나는 더 이상 미소할 수 없고 스스로를 곰팡이로 여기며 민감한 살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어
나를 놓지 않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나 희미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도, 점점 휘발되어 가는 내 영혼을 바라보면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원 같은 게 돼 오늘은 또 내 어디가 사라졌을까 이렇게 갉아먹듯 사라지는 동안 이 비도 멈추고, 너도 돌아오겠지 아마
-김하늘, 『샴 토마토』, 파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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