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헌 시인 / 마魔의 삼각지대
버뮤다, 그곳에 이런 시가 있다 하자
아침 바람은 저녁으로만 분다 저녁은 붉은 울음을 토해놓고 미궁의 밤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누가 이처럼 선명한 고백을 슬픔이라 하나 새들은 붉어진 눈으로 난바다의 해조음을 찍어 바른다 도끼날처럼 반짝이는 섬광 뒤로 비행운이 끊긴다 그때마다 놀란 재들은 말들을 집어삼키고 나침반도 없는 귓문 밖으로 사라진다 멀고 먼 우주에선 하늘과 바다도 한 쌍의 조가비 아무도 사라진 진주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플로리다. 그곳에 이런 시를 평하는 사람이 있다 하자
바람의 노래는 있었지만 슬픔의 노래는 없었다 아침의 노래는 있었지만 저녁의 노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선 없는 것도 있는 것이며 있는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항로를 잃어버린 눈과 귀들은 착란과 같아서 결코 새들의 언어를 해독하지 못할 것이다 항차 문자와 서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음유의 장난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난잡한 비유 같지만 음유와 음흉은 길항과 같아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푸에르토리코, 그곳에 이런 글을 읽은 독자가 있다 하자
우리는 당신들을 원하지만 당신들을 원망해요 우리는 문명을 모르지만 문맹은 아니어요 우리는 구름 위의 시보다 바다 위의 시를 원해요 우리는 새들의 언어보다 당신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는 당신들을 찾고 싶지만 찾을 수가 없어요 이곳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사라진 자리 어쩌면 당신들은 마희魔戱를 즐기는 이방인들인지도 모르죠 세상에 불가사의한 것은 많아도 불가해한 것은 없어요 마의 삼각지대는 바다에 있는 것만은 아니죠.
-계간 『POSITION, 2014년 가을호
이용헌 시인 / 블라인드 테스트
자, 무대는 흰 종이입니다 대상은 검은 글자입니다 투명유리액자 속에 검은 글자들이 가득합니다 눈을 가리는 대신 액자 속의 이름을 가리겠습니다 혀 아닌 눈으로 감별해도 좋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도 상관없습니다 중얼중얼 뇌까려도 반칙은 아닙니다
자, 질문 들어갑니다 액자 속의 이름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잘 아시겠지만 여기 놓인 검은 글자 속에는 시중에 흔치 않은 메타포 액상이 들어갔을 수도 있고 자기만이 개발한 알레고리 분말이 들어갔을 수도 있고 새로 특허 출원한 패러독스 색소가 들어갔을 수도 있고 환상적인 이미지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감각이 묘약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자기도 모르는 아포리즘이나 페이소스가 속임수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자, 우선 제품의 특징이 보입니까? 혹시 기성 제품을 모방하진 않았습니까? 정말 독특하고 뛰어납니까? 정말 미래지향적이고 환상적입니까? 진실로 아름답고 감동적입니까? 진실로 장인정신이 느껴집니까? 아, 왼쪽에서 세 번째 계시는 분 이름을 들춰보시면 안 됩니다 이름 속에 담겨있는 학연과 지연과 혈연과 실핏줄 같은 인연은 다 거둬주길 바랍니다
자, 무대는 흰 종이입니다 그야말로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맹물로 입을 헹구고 찬이슬로 눈을 적시고 솔 바람에 귀를 씻고 다시 원점에서 투명유리액자 속을 찬찬히 살펴보세요 그리고서 액자 속의 이름을 맞춰보세요
저기, 오른쪽 맨 끝에 계시는 분 땀을 는질는질 흘리시는군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시인입니까? 독자입니까? 평론가입니까? 아니면 이름으로 이름을 사고파는 이름난 글자공장 청맹과니 주인입니까?
블라인트 테스트 : 사전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눈을 가지고 하는 실험.
- 계간 『시와세계』 201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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