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시인 / 몬스테라 몬스테리아*
넌 구멍난 심장을 가졌구나 자꾸만 무성해지는 심장의 둘레를 열대의 기후 속을 걸어보는 저녁 서로의 심장을 베고 잠들었다 없는 부분을 만지면 깊이 잠들 수 있으니까 없는 부분의 이야기는 불행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없는 것만이 있는 것처럼 자라고 있다
서로를 갈아입고 싶어서 잃어버린 것들 우리는 그것들만 키우려 한다 그 속에서 드나들고 그 속에서 지워지고 싶어 어디에도 닿지 않으려는 허공의 뿌리로 흩어진다 투명 속을 걷는 일처럼 난 그게 좋아서 막 뛰어다니기도 했다
여름이 오면 어디든 떠나자고 했다 열대 속에서는 잠들 수 있을테니 자꾸 만나자 자꾸 만나서 어긋나자 서로를 바깥이라 부르며 깊어지자 후렴구만 같은 노래로
자꾸만 구멍이 자란다 모퉁이도 없이 어떻게 둥글어지겠어 우리가 멀어질수록 안심이 되는 마음처럼 우리가 같은 구멍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이런 불행이라면 우리는 만나도 되겠습니다
* 천남성과에 속한 상록 덩굴성 식물
이승희 시인 / 정원의 세계
첨벙첨벙 꽃이 피고
드디어 나무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꽃송이 속으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쏘다녔고 나는 물 장화를 신고 정원을 쏘다녔다
해당화 그늘 속으로 헤엄치는 날들이 많아졌고 여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나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몰라서 멈출 수 없는 놀이
매일매일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별의 일에 대하여 날마다 멀어지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말에 대하여 잠든 것들의 모든 기척처럼 번지는 핏방울에 대하여
손을 숨길 주머니도 없이
벗어둔 물 장화 속으로 물이 가득 차서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모퉁이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와서라고 할 수 있을까 끝은 얼마나 아파야 제 끝을 다른 끝에게 내어줄까
쓰러져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 세계는
이승희 시인 / 늙은 토마토는 고요하기도 하지
거짓말처럼 제목이 바뀌어버린 생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늙는 일에 열중이신 늙은 토마토는 오늘도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읽는다. 늙는 일도 아직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 비명을 지르고 절벽을 뛰어내리던 날의 열렬함과 다르지 않다고.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호호 불어 피우던 휘파람 같은 구름이 간다고 쉽게 쉽게 열리는 일. 세상이 붉게 충혈된 눈 속이었을 때 나 더 붉게 붉게 밀어올린 빨강의 이름을 조금씩 잊는 일. 그러나 지금은 늙어가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할 때, 세상 밖으로 자꾸만 몸이 기울어도 당신의 이름을 웅크려 쥐고 이건 다 내가 스스로 원했던 거라고 말할 수 있기를. 입속에서 뜨고 지는 하루를 조용히 우물거리며 물고기처럼 동그랗게 눈 뜨는 일은 당신에게 동의하는 마음 같은 거. 조금씩 어두워지는 저녁 오늘의 죽음이 내일을 열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 즐거운 불안에 대하여.
이승희 시인 / 여름의 우울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거지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거지 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 놓고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은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혜정 시인 / 우화(羽化)* 외 1편 (0) | 2022.08.28 |
---|---|
김영호 시인 / 산중명상(山中冥想)1 외 2편 (0) | 2022.08.28 |
이용헌 시인 / 마魔의 삼각지대 외 1편 (0) | 2022.08.27 |
김혜천 시인 / 허들 외 2편 (0) | 2022.08.27 |
임술랑 시인 / 휴지통외 1편 (0) | 2022.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