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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인서 시인 / 춘분점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9.

류인서 시인 / 춘분점

 

 

낮과 밤, 그 사이에 생략이 살고있나

호주머니에서 녹슨 동전이 튀어나온다

건너온 날짜들이 건너뛴 골짜기 같다

 

“겨울엔 나무의 영혼만 보여”* 그 말에 내가 잡혀 있는 동안

나무는 겨울을 떠나고 있었다

풍경만 남아 남은 겨울을 잡고 있었다

 

동서남북을 몰라도 좋아하는 방향쯤 있지 않겠니?

빈 종이를 들고 와 동서남북 놀이 하자던 친구는

부활절의 익은 달걀에서 장미를 꺼내주던 그 아이, 자라면서

안개꽃을 사랑했다

안개 밖이나 햇빛 속에서 우리 종종 그림자를 잊었다

 

춘망 춘몽 중얼대는 틈에 나를 비껴간 풍선 편지들 적도를 잘 지났는지,

안부의 발코니에 닿았는지,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밤이고 낮인 이곳을 생각하다

저 혼자 아름다울 외계행성의 명암경계선을 그려보다

 

종이 바람개비를 만든다

어제와 오늘을 빌려 태어난 감정의 이 낯선 신생아에게

쥐여 주려고

 

*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대사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2년 3월호 발표

 

 


 

류인서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2001년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에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작과비평, 2005)와 『여우』(문학동네, 2009),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와 『놀이터』 (문학과지성사, 2019)가 있음. 2009년 제6회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2010년 제11회 청마문학상 신인상, 2013년 대구시인협회상, 2015년 지리산문학상, 2019년 김춘수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