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연경 시인 / 부겐빌레아
가파른 절벽뿐이랴 세상은 꽝꽝 언 강 디딤돌 삼고 부르튼 발 타박타박 산정에 올라 고독한 나목으로 한생 견디자 했는데
눈 덮인 티베트 어디쯤일까 태허에서 막 건너온 듯 누가 불렀을까 아슬아슬한 절벽 너머 어렴풋한 꽃길
얼음벽 뚫고 첫새벽을 달려온 사람아 찬바람 지친 옷 벗고 절벽 좁은 바위틈 지나 꽃길로 오려무나 부겐빌레아, 내 꽃그늘에서 쉬려무나 이제 서러움에 퉁퉁 불은 뜨거운 내 젖가슴 환한 꽃불로 너를 품으리니
사람아 네가 오는 깊은 밤 억만 리 생살 찢어 가시 틔워 견디고 네가 오는 길목에서 숱한 손짓의 시간으로 번지고 번지던 붉은 손바닥들의 파닥임 이제 너를 향한 숫한 마음은 웅숭깊고 그윽한 길 찬란한 축제라
아직 절벽 끝에서 한 계절 울음을 쏟는 이 있을 터 사랑은 품에 안고 날개를 달아주는 일 지난날 절벽에 말라붙은 네 날개 깃털 햇살 즙 붉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 앙상한 등에도 날개 돋으리니
새 하늘이 온다 이제 붉게 타오르던 것마저 버리고 나는 너 너는 나 나도 없이 너도 없이 날려무나 날자꾸나 지친 이 쉬다 가는 큰 날개 그림자
석연경 시인 / 독수리의 날들 -천장天葬
라싸의 아침 죽은 식물에서 나온 마른 바람이 푸석한 흙가루를 날린다 초원의 찰나와 영원 곁으로 맨몸을 드러낸 누군가가 온몸을 발가벗고 흙처럼 누웠다
태양의 동공이 흔들린다 벗은 율의律衣의 주름 위에도 흥건한 피비린내가 번진다
독수리의 발톱과 부리에는 그새 핏자국이 묻어 있다 사라지기 쉽게 잘려진 영혼의 뼈들 하늘이 이내 빗장 문을 열고 지상의 한 영혼이 반가 사유에 드는 날 독수리는 신화의 전언처럼 날개의 그늘을 만든다
잠시 어둠을 머금은 침묵, 사이 멀리 숲 속에는 짙은 초록빛이 유영 하고 젖은 새가 뜨거운 숨을 뱉는다
석연경 시인 / 밤 순천만
순천만 밤 펄을 마주한 사람은 안다
젖는다는 것 젖어 있다는 것은 온몸으로 사랑하는 일 햇빛 어둠 달빛 온몸을 내어주고 그저 그 사람이 되는 일 그 사람을 아는 일
바위마저 바람에라도 젖어 온몸으로 사랑하는 순천만의 밤
살을 마주치는 것 몸을 맞대는 것 그리하여 두 눈 마주치고 갈대처럼 어우러져 어깨춤 추는
융숭한 한 세상 순천만 밤 펄을 보면 알리라 젖어 있을 때라야 사랑이라는 것을
- 시집 『독수리의 날들』(천년의 시작 005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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