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인 / 살아 남겨진 사람들
키오스크가 작동하지 않는 극장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한다. 직원에게 ‘살아남은 자’를 보겠다고 하니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정정해 준다. 감독 버르너바시 토트는 어떤 단어에 시선을 두었을까. 사람과 자者의 차이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있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데 있나. 노출과 감춤에 있나. 드러남과 드러냄의 빛의 각도에 있나.
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브레히트처럼 더 무거운 기록을 남긴다. 나도 살아남은 자다. 살아남은 자는 무언가 미안한 자세를 취한다. 고개를 숙여야할 것 같고 도망자의 범주에서 기회를 보는 현실적인 인물로 커튼 뒤에 가려져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대상이다. 교훈을 줄 것이고 그들의 역경을 경험담으로 풀어낼 것이다. 초록 담장 아래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세수할 물을 조금 덜어내어 커피 물을 끓이는데서 자존의 향기는 더 짙어질 것이다.
모두 살아서 남겨진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자者들, 그림자 뒤의 그림자를 덮으며 남아있는 햇살의 찰랑거림을 만져보는 사람들, 나도 살아남은 사람들 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오래도록 제목을 되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과거의 영화를 들여다본다.
계간 『시와 편견』 2021년 봄호 발표
한정원 시인 / 야상 점퍼
카키는 잉여의 색깔일까 초록으로 물들다가 빠져나온 시간들이 엉겅퀴 들판 가득 잠입해 있다 카키는 중무장할 수 있는 나무들의 기회
어깨에는 견장을 달고 팔꿈치에는 가죽 한 겹을 덧댔다 바람이 긴 행렬에 맞춰 차갑게 포복하고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카키는 흙먼지의 색, 모래의 색, 바다의 색
나도 야상을 입었으니 덩케르크에 갈 수 있겠다 개망초 꽃을 가슴과 모자에 꽂고 줄사다리로 상승하는 핵소고지에 도착할 수 있겠다 주머니 가득 하얀 서류를 찔러 넣고 태양을 향해 경례를 붙여볼까
이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는 거야 옷을 잘못 입었을 뿐이지 이 세상에 불편한 옷은 없는 거야 주머니가 두 개 밖에 달리지 않았을 뿐이지
가슴과 등에 은빛 지퍼를 달고 모래와 화염과 눈송이를 운반해도 좋을 새벽 헬리콥터는 프로펠러의 각도로 펄럭거리고 나는 시베리안 허스키의 귀를 빌려 세상 너머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겠다 보조 주머니에 먹이를 가득 장전하고 되돌아오는 줄을 당길 수 있다면
카키는 키가 크는 색깔 시인이 되려다가 조종사가 된 한 남자가 야상을 입고 사막을 건너며 매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도를 들려준다 구름과 별을 지상에 적재하며 우리는 점퍼를 입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야성으로 말한다
아홉 개의 주머니에서 쏟아지는 들꽃의 모래 빛 이야기들
계간 『열린시학』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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