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연 시인 / 플러그를 꽂으며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는 순간 안쪽으로부터 튀는 파란 불꽃
작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 모든 것은 익숙해지면서 낡아가고 단단하게 고정시켰던 나사 하나부터 언제부턴가 헐거워진다
가장 가까운 접촉에서부터 불안한 틈이 벌어지고 내 몸에서 내가 아닌 그대 몸에서 그대가 아닌 불순한 자유는 또 다른 길을 꿈꾼다
움찔, 파란 불꽃 속으로 나의 불편한 뒤편이 보이고 불꽃으로 사라진 그대는 안녕하신가?
콘센트와 플러그 꽉 낀 추억이 검게 그을려 침묵하고 있는데
박혜연 시인 / 나무서랍, 따뜻한
그녀의 손에 오래된 나무서랍들이 숨어있다 한 손이 없는 그녀에게 악수는 추억이어서 그녀는 악수 대신 나무서랍을 열어보며 준다 서랍 열면 단발머리 찰랑이던 여고시절의 그녀, 흑백 사진 속에서 두 팔 활짝 벌린 채 하얀 금낭화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시집을 읽던 귀퉁이 낡은 앉은뱅이책상과 툴툴거리며 돌아가던 방앗간이 보이고 기계 속으로 떨어진 시집 속의 네잎클로버를 잡는 그 순간, 그녀의 행운은 끝났다 크고 작은 나무서랍이 빠르게 열렸다닫힌다 환했던 그녀의 웃음은 하얀 붕대에 감겨 창백해지고 꿈 많은 세상을 향해 펼쳤던 그녀의 두 팔은 반쪽만 남았다. 오래된 그녀의 나무서랍을 열면 단발머리 순천여고 여학생이 뛰어나와 반갑게 안아주고 두 손 잡아줄 것 같지만 지문이 닳아버린 그녀의 손은 남은 한 쪽만으로 나무서랍을 열었다 닫는다 꽉 잡은 십자드라이버로 헐거워진 서랍을 꼭꼭 조이고 기름을 치는 그녀, 손을 잃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되어 따뜻한 나무서랍을 가졌다
박혜연 시인 / 거기가 그립다
내 눈 속에서 별빛이 사라지지 않아 어머니 가신 슬픔의 뒤끝이라 생각했어 그 빛 더 깊이 어루숭어루숭 해져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라고 부르기에 나도 나라고 기억하는 거울 속의 저 얼굴 저 얼굴을 만나보고 싶은 것일까 내 눈 속에서, 우물처럼 눈이 깊은 아이는 까르르 까르르 웃고 저 풍경이 아직 살아있었나 봐! 당산나무 푸른 잎사귀 바람에 흔들리고 올려다 본 하늘에 잎사귀만한 별, 별들 쏟아지는 별과 함께 아이가 뛰어나와 아이의 눈으로 너무 많은 별를 품은 죄 너무 깊은 하늘의 끝을 올려다 본 죄를 의사는 무심히 혈관이 터졌다고만 했어 내 몸에 담은 별을 모두 돌려보내야 할 별의 시간이 오는 것인지 몰라 깊이 박힌 별을 뽑아내야 할 손이 이미 도착했는지 몰라 빛이 새는 쪽으로 알약을 삼키며 가만 가만 내 몸을 더듬어 봐 내 몸 어디에 별의 길을 숨겨두고 아이는 달아난 것일까, 들여다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거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기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거기 내 몸 안에도 있고 내 몸 밖에도 있는 거기, 아아아 내 목소리 들리니? 나는 내가 있는 거기가 그리워
박혜연 시인 / 테이크 오프takeoff
참 오래 발효된 문장이 있었습니다 그대에게 꽃피기 위해 걸어갔던 몸에서 켜켜이 돋아나는 날개가 숨을 쉽니다
유도등 없는 세월의 활주로를 기억하시는지요 금 간 틈 사이에 돋는 민들레 한 송이 오래된 항공지도 속의 납작 눌린 별자리 이름 부르지 않고 마음에 웅크린 날개 먼저 꺼내려다 날기도 전에 자주 발 걸려 쓰러진 시간 그대의 둥글고 깊은 눈이 있어 나는 그 눈빛의 눈부처로 마주 섰습니다
내가 걸어온 지상의 골목골목이 활주로 위로 펼쳐져 있습니다 외등이 꺼져 있는 골목을 돌아 돌아 천천히 걸어갑니다. 만약 깊은 웅덩이를 만난다면 그건 빈 마음이 집지은 허방일 것입니다
그 깊은 밤에 탄생하던 소행성이 내 우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태워야 별의 이름을 얻는 하늘의 사랑 있어 깊은 바다 같은 그대 눈이 유영하는 곳으로 저녁으로 걸어오던 발효된 문장들이 바람의 부드러운 날개를 펴고 이륙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잠깐
사람의 속도가 또 다른 사람의 속도를 안아주는 순간 그 순간에 가장 빠른 속도가 납니다 그대의 혈관 하나하나에 붉은 활주로는 펼쳐지고 저기 깃발 같은 노을이 미륙신호를 보냅니다
그대가 나를 읽기 시작하였으므로 아름다운 비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박혜연 시인 / 각角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오른쪽 엉덩이를 지나 다리까지 뻗치기 시작했어. 한의사의 침은 섬세하고 가늘지만 내 깊은 뼈에 앉은 뒤틀린 각까지는 닿지 못했어. 자주 스트레칭을 하세요 허리강화운동을 받으세요. 치료법만 쏟아져. 누군가 내 각을 꽉 쥐고 있어. 걸을 때마다 각이 뒤틀려.
허리를 쫙 편 0도에서 시작해 허리와 배가 하나 되는 180도까지 나의 각은 활시위처럼 유연했지. 어디에 서 있는 중심은 잃지 않고 내 보폭만큼 걷는 다리도 가졌어. 내 기울기만큼 저 쪽를 끌어당기며 어떤 생과도 둥글게 맞닿는 것 몸이 먼저 알았기에 당신, 사랑과 단단히 어깨걸이하고 살았지만,
문제는 45도와 90도의 각에 있어, 나는 45도와 90도를 강요당해 왔어. 반각의 오차범위를 허용하지 않는 각의 정글, 생존법칙은 그 각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구분돼. 각도기를 든 절대자의 손은 45도와 90도 사이에 든 각의 손만 잡아줘. 나의 허리도 경쟁자의 허리도 그 각에서 멈춰있어.
십자수 쿠션을 등 뒤에 놓고 누웠어. 허리 뒤로 멈춰있던 각이 삐걱삐걱 녹슨 스프링처럼 몸을 뒤틀어. 110도, 120도, 130도... 물리치료사의 손이 잊고 산 각의 길을 내 몸의 지도에서 찾아내고 있어. 당신과 한 각이 되던 적이 언제였지? 서로를 놓지 않는 홍예다리의 둥근 각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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