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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새벽 시인 / 검은 이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8.

신새벽 시인 / 검은 이력

 

 

방음벽 유리에 박제된 듯 독수리 그림

과속이 멈춘 곳

미루나무 적막 속에 갇혀 부풀린 날개는 서서히 탈색되고 있다

 

뜨거운 햇빛이 검은머리 정수리를 쪼아대어도

돌아누울 수 없는 납작한 영혼

 

칼날에 오려진 날개가 글썽이며 너덜거린다

 

다른 새들의 침범을 막기 위한 미약한 경고

유효기간을 넘겨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절여진 동물*처럼 미학도 없는 끈적임뿐

들추어 내지 못하는 이력은 사라지지 않고

옅은 지문으로 시나브로 변형

 

내상(內傷) 없는 생

 

그을음, 검은 혈관이 두터워져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금지구역에 빛 잃어가는 독수리 한 마리 산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신새벽 시인 / 가라앉는 섬

 

 

“이 처방전을 들고 절대 약국을 지나치지 마시오“

 

의사는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명령하듯 말한다

 

미열처럼 권태로운 일상

테두리 부서지는 감정선들

은유의 사막화로 칭얼거리는 나에게 건네준 처방전

 

거대한 어항을 닮은 바다가 창문 넘어 일렁이고

중력이 비껴간 불가사리들이 하늘을 나는 약국

모든 은유가 진열된 그곳엔

초조와 불안을 잠재울 약들이 가득하다고

 

치자꽃 향기 나는 네루다*파스를 가슴에 붙이면

가라앉으려던 정서의 섬이 조금은 떠오를 거라고

동백꽃 문장들로 만든 환(丸)은

길고 긴 글자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처방

 

모호한 형체를 한 섬들이 떠다니는 진료실

호흡은 비상등처럼 깜박이고

검은 글씨로 빼곡한 처방전이 파르르

 

의사뒤편, 흐릿한 거울에 내 반쪽 얼굴이 비추고 있다

 

*칠레 시인

 

 


 

 

신새벽 시인 / 파랑 아카이브

 

 

클랭*의 파랑을 표절한 바다, 울트라마린

 

이제 막 노을이 엎어진 갯벌에

모노크롬 터치들이 시작되고 있다

 

머뭇거림 없이 잡아채야 하는 속도전

파랑만 건져 올려 고요와 함께 봉합해

어둠의 서랍 속으로 밀어놓는다

 

붉은 얼굴이 반쯤 남았던 해는 빠르게 문을 닫아걸었다

 

해안선 철조망은 낯선 발자국을 경계하고

하얀 어깨를 처박은 폐선이 낡은 시간을 부비고 있다

 

해당화는 서걱서걱 모래를 씹고

난 아직도 파랑이 아쉬워 허기를 느낀다

누군가 흘리고 간 우울을

혹여 새의 깃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불현듯 맨발로 걸어야 한다는 몸의 신호

상형문자 그려진 갯벌을 탐색하듯 걷는다

시나브로 어둠을 깨며

파랑을 채집하고 인화한다

 

스크랩하며 겹겹이 쌓아놓는 일, 에뛰뜨** 블루

 

파랑의 혈통을 가질 수 있다면 내 혈관은 파랑으로 채워지겠지

 

* 이브 클랭 : 프랑스 화가(IKB 자신이 만든 파랑).

** 공부라는 뜻의 프랑스어.

 

 


 

신새벽 시인

경북 의성에서 출생. 2017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현재 『빈터』 동인. 현,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