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시인 / 검은 구두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리멸렬한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 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김성태 시인 / 문득 멈춰 서서 오 분
양복들이 그러데이션으로 걸어간다 그림자가 상처 없이 유리창을 통과한다
좌표 없는 풍경 낙하하는 저녁 날개 닳은 새에게서 붉은 석류향이 나네
수의 같은 목련잎 닳아 떨어진다 나선형의 철제계단 아래서 목이 잘린 증명사진 꺼내 보던 날
돼지머리들처럼 꿀꿀 금니 속에 비치는 얼굴들 모두들 코는 같지만 소리는 다를 거야
온몸을 전선줄로 친친 감은 전봇대 발밑에는 몇 볼트의 임파선이 퍼져 있을까 플랫폼의 빈 의자가 엉덩이를 기다린다
순환 열차의 종점은 내리는 역이지 왼손 검지와 오른손 검지로 굳은 부리를 차츰차츰 끌어올려 봐 보도블록 빈 곳 코트자락에 달라붙는 바람의 각질들 오늘처럼 내일로 굴러가는 머리들 사이 번져가는 달의 곡선을 기억해
김성태 시인 / 거인 소설
1
내가 십분의 일로 작아졌을 때 먼지는 부피를 가졌고 모든 풍경은 투각이었다 옥탑방은 넓었고 너는 나를 지나쳤다 너의 뼈마디는 사다리처럼 놓여 있었고 검은 털은 잎사귀처럼 매달려 있었다 네 겨드랑이 틈에 둥지를 틀고 싶었다 너는 나를 어두운 무게로 쳐다보았다 내가 보는 것이 너의 전부는 아니었을까
2
내가 십분의 일로 작아졌을 때 조간신문 첫 페이지 행간에 살았다 나는 어제의 시간 속에 놓여 있었다 줄어든 만큼 허공의 빈 곳은 높아져 갔고 전족을 한 여자처럼 총총 걸었고 위층 여자에게 설탕을 빌리러 가는 길이 성경을 들고 교회에 가는 길이 신대륙을 찾는 항해와 같았다 미사포가 폭설처럼 몸을 덮었다
3
내가 십분의 일로 작아졌을 때 식빵 부스러기는 일용할 양식이었고 수프 한 방울에 몸이 흠뻑 젖었다 흰 티셔츠가 헐거워지자 개미의 그림자가 돌멩이만 하다는 걸 알았다 내 몸의 구멍들이 작아졌을 때 염주와 묵주가 고래 눈알처럼 굴러다녔고 태양과 정물이 거대하게 나를 둘러쌌다
김성태 시인 / 거꾸로 풍경 산책
이 소인국은 나를 기둥삼아 비껴가고 나는 너로부터 이방의 관찰식물이 되어간다 도서관은 점자들의 숲이다 나는 책을 읽을 수 없고 초식 동물처럼 느릿느릿 페이지를 긁는다
나는 유령이므로 새벽에 서술되고 사람이 없을 때 완전한 사람이 된다 얼굴에 달라붙는 순진한 눈동자를 고구려처럼 광활하게 커지는 귓속말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너와 다른 윤곽이므로,
따뜻한 해변과 피부를 이야기할 때 물고기는 물고기와 아가미를 깜빡인다. 목소리가 없다. 이 소민국에서는 손으로 말하는 것이 대화의 형식이다. 휠체어 바퀴가 싱싱하게 굴러가는 길이 길이다.
유리창 너머의 풍경 속을 걸을 때마다 알약처럼 박힌 보도블록 위로 굴러가는 시선이 나를 뼈만 남게 했다. 이발소의 액자처럼 배경일 뿐이라는 듯 나는 너로부터 외딴 섬이 되어간다.
김성태 시인 / 천체 관측
구름이 쓸려가며 숲색으로 짙어진다.
내 목덜미를 만져줄 사람이 없다. 택배상자처럼 빈 집에 몸을 들여 놓는다.
오래된 벽이 호흡하며 공백을 채웠나, 벽지에 붙은 동일 유전자의 꽃잎들이 푸석푸석하다.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질 것 같아서
블라인드를 달빛의 입사각에 맞춰놓는다. 램프를 켠 것처럼 방이 환하게 부풀어 오른다.
기둥을 만들었다 흩어지는 고요. 욕실이 차가워서 나는 흐려지지 않는다.
파란 욕조를 바다라 부르면
그 안에서 나는 외딴 섬이 되는가, 망원경의 표적은 별을 향하지 않는다.
상형문자처럼 새겨진 이름 모를 이웃 하나 훔쳐서 방 안에 들여 놓는다.
여보세요, 이 휑뎅그렁한 구멍에 발자국을 찍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김성태 시인 / 빅뱅
점으로부터 지구는 팽창하므로 낭만적입니다. 씨앗처럼 점이 무럭무럭 자라는 건 사건입니다. 점으로부터 나이테는 돌아가고 나무는 근엄한 성벽이 됩니다. 빗방울처럼 우리는 떨어져 있다가 가까워지면서 사랑의 물로 고입니다. 기다림의 부피는 발자국 소리가 커지면서 부풀어 오릅니다. 점의 무서운 깊이가 아름다운 수묵화를 만듭니다. 붓끝에서 먹이 떨어지면 역사가 탄생하고 우리는 마침표를 무서워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점으로부터 소문은 풍선처럼 커지고 비밀은 폭발합니다. 점의 근원이 달처럼 팽팽해지면 힘도 기우는 법입니다.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으면, 바람은 탱탱해지고 그림 같은 세계의 문이 열립니다. 인드라의 그물 안에서 반짝이는 우리는 보석 같은 점이고 점은 점을 부르고 선으로 이어집니다. 자궁 속의 작은 씨앗에서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지금 한 점에서 꽃이 몽우리를 만들고 벌 떼가 몰려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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