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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정순 시인 / 식물성 계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0.

신정순 시인 / 식물성 계절

 

 

박 할아버지와 김 할머니는 요양원 친구

무릎에 앉은 햇빛 한 점도 나누는 사이다

 

세월에 순해진 식물성 심장

비등점을 놓쳐 끓어오르진 못해도

사탕 몇 개 쥐고 오는 걸음이 천진하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귀에 흘려 넣는 말들은

자주 길을 잃어 엉뚱하게 가 닿기도 한다

젊음의 한때를 늘어놓는 박 노인이

주먹을 불끈 쥐면 이제야 사내다운 사내를 만난 듯

김 노인 심장에 과부하가 걸린다

 

여러 날 김 노인 침대가 비었다

애지중지 키우던 난이 말라가고

소식에 목마른 박 할아버지는 던 눈빛으로

햇빛이 드는 창 쪽을 기웃거린다

챙겨 둔 귤도 시든 지 오래다

 

겨울 속에 숨은 봄이 영 오지 않으려는지

식은 해만 창틀에 걸리는 계절이다

 

 


 

 

신정순 시인 / 안다는 것

 

 

처마 밑 거미줄에 매미 하나 걸렸다

몸부림이 처절하다

거미는 잠시 집을 비웠는지 바로

낚아채지 않는다

저 결박을 풀어줄까?

 

나는 어제 보았다

거미가 첫 실을 바람에 날려 집을 짓는 것을

긴 시간을 허공에서 제 살을 덜어 내

은밀한 마음이 마침내 투명한 허공을 닮아 가는 것을

 

움직일수록 감기는 끈적한 줄을 온몸으로 저항하는

목숨을 두고 돌아서 버렸다

땅 속의 기다림이 흙빛이 될 때쯤 비로소 빛으로 나왔을 것이다

짧은 생이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온몸이 묶인 저 목숨을

거미보다 먼저 만났다면 저 줄을 끊어줬을까

 

난 어느새 아는 녀석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때로는

무섭다

 

 


 

신정순 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2014년 <문예바다>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