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순 시인 / 식물성 계절
박 할아버지와 김 할머니는 요양원 친구 무릎에 앉은 햇빛 한 점도 나누는 사이다
세월에 순해진 식물성 심장 비등점을 놓쳐 끓어오르진 못해도 사탕 몇 개 쥐고 오는 걸음이 천진하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귀에 흘려 넣는 말들은 자주 길을 잃어 엉뚱하게 가 닿기도 한다 젊음의 한때를 늘어놓는 박 노인이 주먹을 불끈 쥐면 이제야 사내다운 사내를 만난 듯 김 노인 심장에 과부하가 걸린다
여러 날 김 노인 침대가 비었다 애지중지 키우던 난이 말라가고 소식에 목마른 박 할아버지는 던 눈빛으로 햇빛이 드는 창 쪽을 기웃거린다 챙겨 둔 귤도 시든 지 오래다
겨울 속에 숨은 봄이 영 오지 않으려는지 식은 해만 창틀에 걸리는 계절이다
신정순 시인 / 안다는 것
처마 밑 거미줄에 매미 하나 걸렸다 몸부림이 처절하다 거미는 잠시 집을 비웠는지 바로 낚아채지 않는다 저 결박을 풀어줄까?
나는 어제 보았다 거미가 첫 실을 바람에 날려 집을 짓는 것을 긴 시간을 허공에서 제 살을 덜어 내 은밀한 마음이 마침내 투명한 허공을 닮아 가는 것을
움직일수록 감기는 끈적한 줄을 온몸으로 저항하는 목숨을 두고 돌아서 버렸다 땅 속의 기다림이 흙빛이 될 때쯤 비로소 빛으로 나왔을 것이다 짧은 생이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온몸이 묶인 저 목숨을 거미보다 먼저 만났다면 저 줄을 끊어줬을까
난 어느새 아는 녀석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때로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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