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숙 시인(보은) / 문(門 )앞에서
대가리를 꼿꼿하게 치켜 든 독 오른 뱀 앞에서 개구리 홀로 얼어붙은 듯 가부좌를 틀고 있다 비늘 돋친 이 독한 세상마저 잊어 버리려는 듯 투명한 눈을 반쁨 내려 감은 채 마른 번개 널름거리는 캄캄한 아가리 속 꿈틀거리는 욕망이여, 온몸 징그러운 무늬의 삶이여 예서 길이 끝나는구나 벼랑 끝에 서고 보니 길 없는 깊은 세상이 더 가까워 보이는구나 마지막 한 걸음, 뒤에서 등을 밀어 그래, 가자 가자
신 한 켤레 놓여 있는 물가 멀리 깊고 기운 물갈퀴 하나 또 한세상 힘겹게 건너고 있다
윤영숙 시인(보은) / 회화나무 평전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 굽은 허리를 쇠기둥에 기대어 쉬고 있다 가슴 한켠 시멘트로 채워진 무거운 노구 이끌고 남쪽으로만 길을 내는 곁가지들 건들기만 해도 툭- 부러진다.
절벽처럼 땜질한 저 늙은 가슴이 왠지 낯설지 않다.
항아리 속 같은 어둠 열어보면 위암 말기판정을 받은 내 아버지 부고장이 다시 와 있을 것 같다 열렸다 닫힌 몸 위로 스테이플러가 꾹꾹 밟고 지난 수술자국 따라 들어가면 아버지 손때 묻은 족보가 묻혀 있을 것 같다.
노거수老巨樹 아래 떨어진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쓰시던 몽당연필 같고 부러진 안경다리 같은 나뭇가지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애기가 애기를 낳았다며 내 볼 쓰다듬어주시던 까칠한 그 손가락이 만져진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세 통을 구해 회화나무 할베 발등에 부어주고 달빛 미끄러지는 덕수궁 돌담길 걸어 내려온다 울퉁불퉁한 세상살이가 끝내 염려스러워 실루엣으로 한없이 내 발자국을 따라오는 아버지 긴 그림자,
({애지}, 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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