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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은영 시인 / 귀소본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1.

박은영 시인 / 귀소본능

 

 

종로 낙원상가, 비둘기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새의 낙원은 하늘이 아니라 종로구이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왔을 때, 버스정류장 앞에서 옷자락을 퍼덕이던 서른셋 여자의 동공은 흔들렸다 하필 , 여름이었고 나는 복숭아맛 하드를 사달라고 칭얼거렸으니 당신 눈에 비친 세상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엄마가 양푼에 찬밥을 퍼 담아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쓱 비벼먹을 수 있는 골목으로 돌아간 것은 본능이었나 날갯죽지가 뻐근하도록 얻어맞은 비만한 몸을 이끌고 낙원의 중심으 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율되지 않은 말들이 새어나왔다

 

이년의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인 게지

 

눈을 부릅뜨고 비벼먹던 그날의 엄마보다

늙고 비만한 나는

비둘기 발목에 쪽지를 묶는 것처럼

파스를 붙인다

 

팔자걸음을 걷는 음표들

비둘기가 낙원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거운 발목 탓일지도 모른다

오선지처럼 전깃줄이 늘어진 하늘은

도돌이표로 연주되고

 

먼 길, 돌아온 자리가 후끈거리는 것이다

 

《시인동네》 2020. 3월호

 

 


 

 

박은영 시인 / 나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자탕 大자가 아닌

우거지 해장국 세 개를 주문할 때

부끄러웠다

아침을 금식하고 위내시경을 받은

늙은 아비와 어미,

먹은 게 없어 깨끗한 위장 속으로

꺼져가는 숨을 밀어 넣었다

등뼈에 붙은 살을 발라먹고

등골을 빼먹고

돼지기름 뜬 국물 한 숟가락까지 잡수신 뒤

얼마 나왔느냐,

들깨가루 묻은 입을 닦으며 계산서를 들여다보다

원고료로 먹고사는 가난한

막내딸의 손에 구겨진 지폐를 쥐어주는 것이다

감자탕 식당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다음부턴 외식하지 말자 체머리를 흔들며

구부정히 언덕을 올라가는 가로 木 세로 木,

십자가모양의 그림자에 업힌 내 가슴은

뚝배기보다 검고

뚝배기보다 무겁고

뚝배기보다 뜨거워지는 것이다

 

- 공시사 2021년 5월호

 

 


 

박은영 시인

1977년 전남 강진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2018년 문화일보·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 농어촌희망문학상.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대상, 2010년 제2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등을 수상.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기독교시모임《품시》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