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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은 시인 / 묵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1.

이상은 시인 / 묵언

 

 

공동현관문을 열었을 때 공동전둥이켜졌다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고

너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공종에서 제외된, 오직 없음이 남았다

 

한글맞춤법처럼 또박또박 살았을 수행

원칙으로 하되 예외를 허용하기도 하는

모호한 규정 탓에 자주 사랑도 틀렸다

 

절없이, 하고 싶은 말이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이

 

지금은 가독이 불가한 시절

견디고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더 견디고 있을 생이 어디쯤 있다는 것

나는 알고 있으면서

너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서자 새들도 떠나갔다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중이다 말도 없이

너는 원칙적으로 나는 예외적으로

생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상은 시인 / 부딪치고 싶은

 

 

별이 내게 오고 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황홀한 직진이

내게 오고 있다

어두운 밤이어서 다행히

길을 잃지 않았다

 

살고 싶어 미치고 싶은 방향은 어디입니까

 

그런다고 미치지도 않고 살아지지도 않을

혼돈을 뚫고

발가락 사이로 우주가 쿵, 떨어졌다

 

항로를 이탈한 별똥별

드디어 몸을 던졌다

소행성에서 불규칙한 빛이 났다

간절한 안부가 내게로 오고 있다

 

전속력으로 부딪치고 싶은 추락

오늘 밤 나는

숨을 죽이고 전속력으로

여기 있기로 했다

 

 


 

 

이상은 시인 / 카니발리즘

- 빗방울

 

 

배가 고파요 엄마

빗방울이 빗방울을 먹고 있네요

엄마보다 먼저 태어나서 미안해요

먼저 태어났으니 먼저 죽을게요

 

우리 투명한 거 맞죠

오늘 이상한 동족을 먹었어요

물컹한 비 맛이 났어요

 

우리 보이지 않는 거 맞죠

누군가 잡아먹고 버린 우리는

껍질마저 투명하네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볍게 밟고 가네요

이런 허기 조금 참아볼게요

비가 와도 태어나지 않을게요

 

보이지 않도록 한 며칠

안녕처럼 걸어가고 있을게요

 

 


 

 

이상은 시인 / 쓸모 있는 배후

 

 

공원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순간의 나를 나도 모르게 데리고 간다

화면을 빠져나가는 어깨를

휙 돌아보는 그림자를

전화번호 목록을, 데려갔다가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아무도 안녕을 물어오지 않는

그러므로 그날

내가 폐차장으로 간 까닭은

그런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배경이나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압축된 쓸모 없는 것들이

얼마나 쓸모없이 따뜻하게 서로 기대어 있었는지

사이에 꽃이 피기도 했다

심지어 꽃이 지기도 했다

오늘의 예보는 서쪽으로 해가 진다고 한다

타이어 구멍마다 해를 들이고 앉아

버려진 나와

버려진 배경 하나쯤 갖고 싶었다

그게 그날의 다였을 것이다

 

 


 

이상은 시인

충남 전의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1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느 소시오패스의 수면법』, 『외로움이 죽어서 물방울이 된 줄 알았다』가 있음. 인천문협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