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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니 시인 /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1.

이제니 시인 /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기분 나무는 구름의 영토 서쪽끝에 도열해 있었다

그늘 밑에는 알파카 나의 알파카가/ 어느새 우리는 구름의 영토 끝까지 날아왔구나

 

무구한 검은 동공이 소용돌이치며

연관 없는 어휘들의 밤 위로 날아오를 때

 

너는 어리지 않다

너는 늙지 않았다

너는 아직 늙지 않았다

 

꼭짓점과 모서리들이 멀어진다

나는 몇 개의 점과 선과 면을 간단히 밀어낸다

 

발밑에는 줄지어 누워 있는 녹색의 풀

구름의 무덤 곁에선 녹색의 목소리가

 

나는 이 생을 두 번 살지 않을 거야

완전히 살고 단번에 죽을 거야

 

알파카 나의 알파카

아름다운 얼굴이 그 여린 솜털이

부드러운 바람에 조용히 흩날릴 때

 

나는 지구의 회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백을 믿는다

 

나무의 수맥을 따라 흐르는 물결 너머

테두리를 잊은 마음이 밀려온다

 

 


 

 

이제니 시인 /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기차는 얼음의 나라로 간다고 했다.

하얀 눈 위의 하얀 나무 속을 건너간다고 했다.

왜 그곳에 가려했을까.

왜 그것을 보려 했을까.

너는 얼음도 구름도 바람도 물도 없는 곳에 도착한다. 너는 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세계는 천장 한 귀퉁이로 모여드는 세 개의 직선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하나의 꼭짓점에 모인 세 개의 직선을 늘릴 수 있 는 데까지 늘리고 늘린다. 직선은 점점 곡선으로 휘어진다. 휘어진 곡선이 너를 향해 모여든다. 무수한 사람이 네 속에서 들끓고 있다. 무수한 목소리가 네 목소리 위로 내려앉는다. 무수한 길들이 너를 지나간다. 한 발 걸어가면 한 발 멀어지는 들판이라고 했다.

기차는 하연 눈 위의 하얀 나무 속을 건너가고 있다고 했다. 너는 기차에 실려 간다. 너는 마비된 채로 나아간다. 너는 시간에 굴복한다. 너는 중력에 결박된다. 너는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움직이고 있다. 밤과 낮으로, 머리와 영혼으로, 몸의 안과 밖이 함께 움직이며 널 데려간다. 너를 데려가는 곳은 언젠가의 너 자신이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매 순간의 너 자신이다. 너는 작아지면서 어려진다.

열리고 열리는 여리고 어린 삶.

왜 멀리 멀리로 가려 했을까.

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려 했을까.

기차는 달리고 너는 얼음처럼 누워 있다. 열린 차창 너머로 눈이 내린다. 물의 자리로 얼음이 온다. 얼음의 자리로 얼음의 나무도 온다. 얼음의 나무 곁으로 얼음의 바람도 온다. 얼음 이전에는 물이 있었다. 물 이전에는 구름이 있었다. 구름 이전에는 네가 있었다. 너 이전에는 구름이 있었다. 구름 이전에는 물이 있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순차적인 동시에 일순간에, 사물이 자신의 자리로 도착하고 있었다. 너를 뒤쫓듯 사물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한 발 멀어지면 한 발 나아가는 들판이라고 했다.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는

믿기지 않는 삶.

너는 사물들의 자리에 사물처럼 놓인다. 너는 너 자신의 고통에 순응한다. 너는 네가 알고 있던 사물들의 윤곽 없는 윤곽에 압도당한다. 흰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 것은 희디 흰 눈뿐이라는 듯이, 검은 사각형을 지나는 검은 사각형을 바라보듯이, 기차는 이전의 나라로 간다고 했다. 하얀 눈 이전의 하얀 나무 이전의 들판 이전의 들판을 건너간다고 했다. 들판 이 전의 너에게로 가고 있다고 했다. 열린 차창 너머로 눈이 내린다. 물의 자리로 얼음이 내린다. 무수한 나무들이 무수한 빛이 되어 줄지어 달아나고 있다. 년 달아나는 속도로 빛나는 것들을 본다. 달려가는 속도로 물결 치는 것들을 본다. 어떤 조건 속에서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기도 했다.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얼음의 나라는 얼음의 나무와 얼음의 바람과 얼음의 구름이 모여든다고 했다.

천장도 바닥도 없는 곳이었다. 너는 얼음의 숲에 도착한다. 뒤늦을 수밖 에 없는 자리에 뒤늦은 이름으로 도착한다. 얼음의 나무 곁으로 얼음의 바람이 온다. 웃으며 춤추며 웃는 얼굴이 온다. 웃으며 춤추며 울고 웃는 목소리도 온다. 사물들은 꿈에 저항하고 기억을 배반하고 서로의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폐허의 자리에서 울리는 서로의 소리를 덧입고 있었다.

기차는 얼음의 나라로 간다고 했다.

하얀 눈 위의 하얀 나무 속을 건너간다고 했다.

뜻 없이 마음 없이 흐르듯 흐르듯 건너간다고 했다

 

 


 

이제니 시인

1972년 부산에서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페루〉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모르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가 있음. 제21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제2회 김현문학패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