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시인(남) / 춘양역에서
다음 열차 그 기다림의 시간 어둠에 묻힌 작은 시골역 대합실 외줄기 홈에는 하얀 눈이 쌓이는데 어떤 이는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고 어떤 이는 낡은 신문지를 뒤적이고 나는 낯선 외지의 풍경을 하나하나 서리낀 유리창에 새겨 보고 모두들 아무 말도 내놓지 않아도 쌓이는 눈꽃에 서로의 안부 오늘의 사연들을 애틋한 옛날이야기처럼 피워내고 있다. 창밖에는 간간이 바람이 불고 여전히 하얀 눈이 쌓이고 우리 모두는 다음 열차 그 기다림의 시간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 희미한 전열구 밑에 삶의 한순간 기다림의 의미를 짓고 있는 사람들 졸고 있는 사람도 저렇게 쿨룩이는 사람도 시장기에 지친 사람도 기적이 울리면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길로 그래서 지금의 시간을 버려야 한다.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모두들 다음 열차 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싸록싸록 눈꽃은 쌓이고 나는 다음 열차 그 기다림의 시간을 그리웠던 순간들처럼 조심스럽게 가슴에 찍어 담고 있다.
*춘양역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선 산간지방에 있는 조그만 역
김용옥 시인(남) / 귀향
가리라 어릴적 고향으로
하나 둘 머리끝이 희끗거릴수록 두고 온 것 없어도 더욱 절실해지는 어릴 적 고향
나지막한 언덕배기 낡은 달구지가 긴 하품을 하고 지붕 위에는 빨간 고추가 한없이 익어가는 마을
저녁나절마다 아버님은 외양간 손질을 하고 계셨다
여하튼 가리라 전설처럼 흐르는 고향으로 기필코 돌아가리라
김용옥 시인(남) / 고운 목숨 하나
줄달음 쳐 달리는 차들마다숨 쉴 수 없이 뿜어대는 매연 끝이 없이 밟고 지나가는 구둣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뜨거운 했볕 흙먼지 뒤집어쓰고 바짝 엎드려 죽은 듯이 쪼그리고 있다가 저 멸리 달빛이 쏟아지면 촉촉이 젖어드는 이슬방울에 마른 목을 축이고 휴.ㅡㅡ하고 도로가 전봇대 밑에 시멘트 바닥을 비집고 일어서는 고운 목숨하나 이름 모를 아주 작은 꽃 한 송이 달빛에 살랑거리고 있다 무척 행복해 보인다 내 마음을 울린다 고운 목숨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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