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시인(여주) / 미연靡然
철로변 꽃제비 한 무리 납작 엎드려 있다 흙먼지 뒤집어쓰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 주워 먹으며 한뎃잠을 잔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으스러지지 않으려 엎드리곤 하는 일들이 습관처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내게 허용된 세상은 바닥에 엎드려 흔들리는 일뿐 철로변 아슬아슬한 삶의 무리가 이리저리 바람에 쏠리고 있다
-시집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 중에서
김진희 시인(여주) / 월식
헛손질을 하다 짓찧은 손톱 검은 피가 손톱의 반달을 가리웠다
지금이라는 한때가 느닷없이 자지러지고 있다
나 혼자 앓는 동안 너는 안부도 없고
헛손질 한방에 세상이 고꾸라질 듯해도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 그때까지 잠시 안녕
김진희 시인(여주) / 고슴도치
상처는 제일 아픈 곳으로 파고든다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보이는 상처보다 더 깊고 위험하다지 가시를 품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것 가시가 삐져나오는 만큼 마음 밖은 무너져 내리는 일임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도 알고 있지 몸속에 품었던 가시가 조금씩 자라고 자라 몸 바깥에 경계를 세우기까지 가시 끝에 눈을 달고 살아야 했지 그것이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 그것이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시오 더 이상 흔들어대지 마시오 그냥 내버려두시오
김진희 시인(여주) / 시 계명을 완성하는 시간
나사 ㅂ이 빠졌으므로 손으로 연신 입을 가리는 여자 나사 ㅂ을 넣어야 무언가 완성이 될 것 같은 믿음이 강한 여자는 오늘도 두리번거리며 단어 하나를 열심히 찾고 있다 나사 ㅂ을 찾으려 습관처럼 불을 밝히던 그 여자 제물로 쓰이기에는 쓸데없이 아랫배만 뚱뚱하므로 육체는 더 이상 당신의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라며 회개를 한다 너무도 멀고 먼 길 이제는 색이 아닌 실성한 광기 하나 만으로라도 인도해주시길 시만을 위해 살다가 시만을 위해 죽을 것이므로 추수할 곡식이 많지는 않았으나 간절한 마음 있으니 부디 창고 가득 채워주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꽃들과 나무와 고양이와 개새끼까지도 시를 위한 훌륭한 제물이 되었는데 하물며 너를 내가 외면할까 보냐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이리온나 오늘 밤 나를 먹어다오 아주 죽여다오 내 살과 거꾸로 솟은 피가 네 시를 완성하게 해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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