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로 시인 / 꽃잠
꽃의 죽음은 색을 버리는 일 색이 꽃이었는데 꽃이 색을 버리다니 푸른 잎 껴안았던 용머리도 붉은 꿩의비름도 보랏빛 초롱꽃도 색을 버린 후 꽃을 접었다 색으로 꽃을 썼다가 색을 보내고 꽃이 진다 꽃이 색이었고 색이 꽃이었으나 꽃과 색은 덤덤한 작별을 한다 가끔 색을 갖고 낙하하는 철없는 꽃도 있지만 저승 입구 담 모퉁이에서 반성문을 쓰고 있을 게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땅에 떨어진 낯은 색도 꽃도 다 버린 편안한 잠이다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2021) 중에서
김형로 시인 / 형용사는 불온하다
어느 국가 기관의 원훈석 제막식
커다란 바위에 음각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 뉴스를 보는데 흡! 헛웃음이 나왔다 '한없는' 때문이다 그 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형용사는 믿을 게 못 된다 새빨간 거짓말을 캐듯 사상이 불온하다 엉뚱한 기표에 고매한 기의가 꺼꾸러지기 일쑤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충성과 헌신! 얼마나 단촐하고 멋진가 누가 애먼 말을 강제로 끌어왔는가
한없는, 까진 바라지 않으니 그저 충성과 헌신만 해주시라
사람은 그대론데 바위 글만 바뀐다 번번이 바위가 무슨 죈가 바위에 새긴다고 글이 바위가 되진 않는다
-민족문학연구회 2021년 여름호 회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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