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경 시인 / 서풍바람 불어온다
담배꽁초 비벼 끄고 누런 얼굴의 사내가 트럭에 앉마 주스를 간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산동네 알타이 사막을 떠돌 듯 또 쫓겨 가야 할 재개발 공약, 말초신경이 날카롭다
소라게 한 마리 허름한 집 한 채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오후 집을 내려 놓아야 한다. 서풍바람이 불고 있다
붉은 토마토 한 알이 한 끼의 생계를 간다 올망졸망한 식구가 갈리는 속도가 동그랗다 한 잔의 생과일주스를 사내의 먹이로 부어주는 여름, 믹서기 속 과일보다 더 밝아지고 싶은 사내, 플라스틱 통이 무거워지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그림자만 땅을 짚은 시간만큼 어둡게 눕는다. *한 줄로
단맛 배인 세상 머물고 싶은 자리가 이리 뱅글 저리 뱅글 돌아다니는 시간 과일 대신 그의 하루에 시간의 얼음을 살짝 넣고 돌린다
토마토보다 먼저 붉어진 꽃이 더 밝아지던 날 굴러만 다니는 타이어가 제자리에 옮겨지고 햇빛에 닿은 과일이 붉다
서풍바람 시원하다 마무도 보지 못한 모자 밑으로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마침
김하경 시인 / 간격
아이가 내 등 뒤에서 슬쩍 껴안는다 깊은 봄맛을 한 몸에 요약한 채 내 등줄기 위로 완강하게 엉겨 붙어 사라지는 기억들을 배양하는 아침 저 온기와 내 온기가 제 살결과 내 살결이 서로 끌어당기는 사랑 봄기운이 따스하다
아랫목과 이불 사이 밥사발을 넣으면 제각각인 저것들도 살과 살끼리 맞닿은 자리에 열기를 끓어낸 아랫목 봄꽃이 핀다 아이 온기가 내 안에 따스하게 스며든다 사라지는 체온이 이식되는 동안 간격은 없다 36.5도의 체온을 부비며 온몸으로 사랑을 전달받는 중이다
누구도 떨어트릴 수 없는 이 간격 햇빛보다 더 따스한 사랑 봄은 열리지로 엉겨 붙는다
-시집, [거미의 전술]中 ,열린시학기획시선86, 2015년 고요아침
김하경 시인 / 생일
천장에 매달린 검은 등껍질이 눈부시다 탈피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
내가 어머니를 탈피했듯 껍질을 벗은 거미는 더 큰 몸으로 거미줄을 잇고 있다
새끼는 어미의 껍데기를 보고 자란다 눈먼 사랑도 두루두루 살펴보면 나에게는 꽉 찬 생들뿐이다
어머니를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초상화 고산지대 유패를 모시듯 처마 밑에 사진을 모신다
몸을 비워가며 생을 잇고 또 잇는 어미 등 뒤에서 꿈틀꿈틀 젖먹이 새끼들은 햇살이 둘러싼다
살아서도 가볍기만 했던 짧고 긴 역사에 빛을 보내는 오후 손금거미줄이 울타리가 되었던 거미 앞에 나는 서 있다
해와 구름 사이에 쉼 없이 바뀌는 탄생 껍질을 벗고 또 다른 삶을 이어가는 그것은 내 탈피다
바람소리도 둥글던 날 딸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죽었다 태어난 거미가 흐린 눈을 닦아준다
-2015년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아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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