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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경 시인 / 서풍바람 불어온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5.

김하경 시인 / 서풍바람 불어온다

 

 

담배꽁초 비벼 끄고

누런 얼굴의 사내가 트럭에 앉마 주스를 간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산동네

알타이 사막을 떠돌 듯 또 쫓겨 가야 할 재개발 공약, 말초신경이 날카롭다

 

소라게 한 마리 허름한 집 한 채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오후

집을 내려 놓아야 한다. 서풍바람이 불고 있다

 

붉은 토마토 한 알이 한 끼의 생계를 간다 올망졸망한 식구가 갈리는 속도가 동그랗다 한 잔의 생과일주스를 사내의 먹이로 부어주는 여름, 믹서기 속 과일보다

더 밝아지고 싶은 사내, 플라스틱 통이 무거워지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그림자만 땅을 짚은 시간만큼 어둡게 눕는다. *한 줄로

 

단맛 배인 세상 머물고 싶은 자리가 이리 뱅글 저리 뱅글 돌아다니는 시간 과일 대신 그의 하루에 시간의 얼음을 살짝 넣고 돌린다

 

토마토보다 먼저 붉어진 꽃이 더 밝아지던 날

굴러만 다니는 타이어가 제자리에 옮겨지고 햇빛에 닿은 과일이 붉다

 

서풍바람 시원하다

마무도 보지 못한 모자 밑으로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마침

 

 


 

 

김하경 시인 / 간격

 

 

아이가 내 등 뒤에서 슬쩍 껴안는다

깊은 봄맛을 한 몸에 요약한 채

내 등줄기 위로 완강하게 엉겨 붙어

사라지는 기억들을 배양하는 아침

저 온기와 내 온기가

제 살결과 내 살결이

서로 끌어당기는 사랑 봄기운이 따스하다

 

아랫목과 이불 사이 밥사발을 넣으면

제각각인 저것들도

살과 살끼리 맞닿은 자리에

열기를 끓어낸 아랫목 봄꽃이 핀다

아이 온기가 내 안에 따스하게 스며든다

사라지는 체온이 이식되는 동안

간격은 없다

36.5도의 체온을 부비며

온몸으로 사랑을 전달받는 중이다

 

누구도 떨어트릴 수 없는 이 간격

햇빛보다 더 따스한 사랑

봄은 열리지로 엉겨 붙는다

 

-시집, [거미의 전술]中 ,열린시학기획시선86, 2015년 고요아침

 

 


 

 

김하경 시인 / 생일

 

 

천장에 매달린 검은 등껍질이 눈부시다

탈피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

 

내가 어머니를 탈피했듯

껍질을 벗은 거미는 더 큰 몸으로 거미줄을 잇고 있다

 

새끼는 어미의 껍데기를 보고 자란다

눈먼 사랑도 두루두루 살펴보면 나에게는 꽉 찬 생들뿐이다

 

어머니를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초상화

고산지대 유패를 모시듯 처마 밑에 사진을 모신다

 

몸을 비워가며 생을 잇고 또 잇는 어미 등 뒤에서

꿈틀꿈틀 젖먹이 새끼들은 햇살이 둘러싼다

 

살아서도 가볍기만 했던 짧고 긴 역사에 빛을 보내는 오후

손금거미줄이 울타리가 되었던 거미 앞에 나는 서 있다

 

해와 구름 사이에 쉼 없이 바뀌는 탄생

껍질을 벗고 또 다른 삶을 이어가는 그것은 내 탈피다

 

바람소리도 둥글던 날 딸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죽었다 태어난 거미가 흐린 눈을 닦아준다

 

-2015년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아침 中

 

 


 

김하경 시인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201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2014년 <공중그네>로 전국 계간지 우수작품상 수상. 2015년 가을 첫 시집인 <거미의 전술>을 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 유고 시집이 됨. 전 양산 성모병원 원무과장.(1964~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