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 시인(뿌리) / 군무群舞
가창오리 하늘을 날다 떨어지는 깃털 하나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속도는 사뭇 느리기만 하다 휘청거리듯이 흔들거리며 멀어져가는 창공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잊으려 한다 화려한 군무를 추던 저 높은 곳의 아름다운 시간들일랑 결코 말하지 않아도 될 단 하나의 깃털을 털어내서 허공에 이름을 새기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새기고 간절한 소망을 새기면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조용히 하늘 한 귀퉁이에 걸어 두리라 차갑고 푸른 시절의 힘찬 날갯짓은 겨울 하늘을 곱게 물들이고 질서를 지키며 무리 짓는 꼬리들이 북녘 하늘로 훨훨 날아간다
김현숙 시인(뿌리) / 이제 집으로 가자
열두 살 기억에 갇혀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린다
하나 둘 불려지는 이름 따라 따뜻한 저녁 맞으러 가고 술레처럼 그 자리 벗어나지 못해 우두커니 홀로 서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린다
긴 세월 흘러 이제 안다 열두 살 아이가 평생 기다린 사랑 올 수 없어 더 슬펐다는 것을
이제 쉰 살 그녀가 열두 살 소녀를 안는다 가만히 품에 안아 말을 건넨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제 집으로 가자
김현숙 시인(뿌리) / 동백
엄동설한의 사선을 넘어 곁불처럼 붉게 피어난 너 동백꽃 동박새 나르는 춘삼월 임은오시려나
찬바람 부는 긴 밤 홀로 부르는 노래가 당신의 창을 두드리면 임은 한 송이 꽃 등불 되어 오시겠지요
초록 잎사귀 물비늘처럼 눈부신 오후 뚝뚝 떨어진 꽃길을 걸으며 나 죽어서도 뜨겁게 사랑하겠노라고 부질없는 맹서를 하지요
김현숙 시인(뿌리) / 검은 해변에서
저 기나긴 해변의 몽돌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파도가 물어다 주는 물거품 속에 간질병을 앓다가 죽어간 어린 아이의 말 못할 사연도 있을테고 철썩철썩 뭇매를 맞다가 바위 한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와 이렇게 매끈한 몽돌이 되기까지 사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바다를 비상하던 갈매기는 모를 리 없겠죠 하늘을 닮은 바다지만 별이 없고 달도 없고 해도 없다 하늘을 닮은 바다지만 파도 소리가 있고 밀물과 썰물이 있다 우리는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듯이 바다도 해일을 일으키며 불필요한 것들을 쓸어낸다 이제 생의 언저리에서 나도 쭉정이를 날려 버려야겠다 검게 타버린 몽돌해변에 누워 애꿎은 몽돌의 생애가 서러워 파도에게 덧없이 말을 건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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