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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숙 시인(상주) / 가로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5.

김현숙 시인(상주) / 가로등

 

 

강둑 외진 길에

밤마다 푸른 빛 한 송이

꽃 핀다

 

재재거리는 많은 풀꽃들

머리 위에서

그들 어둠을 쫒아내는

조용한 손사래

 

길이 머뭇거리지 않고

멀리까지 힘껏 달려가도록

달빛으로 떠 있다

 

-김현숙 시인의 시집 "아들의 바다"

 

 


 

 

김현숙 시인(상주) / 큰나무

 

 

작은 새들과 함께 돌아온다

오월에는

머리에 구름을 앉히고

휘어지고 굽이치며 흐른다

비바람을 치켜 올리며 꺾으며

한 뜸씩 허공을 짚어간 손가락마다

푸른 하늘이 느긋이 들어앉는다

스치며 잊은 것

버린 것까지도

갔던 길 되돌아온다

와선 가만히 안긴다

어느 대목 빠짐없이 새눈 뜬다

꽃으로 꽃으로

잎으로 잎으로

 

 


 

 

김현숙 시인(상주) / 풀꽃으로 우리 흔들릴지라도

 

 

우리가 오늘 비탈에 서서

바로 가누기 힘들지라도

햇빛과 바람 이 세상맛을

온몸에 듬뿍 묻히고 살기는

저 거목과 마찬가지 아니랴

 

우리가 오늘 비탈에 서서

낮은 몸끼리 어울릴지라도

기쁨과 슬픔 이 세상 이치를

온 가슴에 골고루 적시며 살기는

저 우뚝한 산과 무엇이 다르랴

 

이 우주에 한 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찍혀있다 해도

 

 


 

 

김현숙 시인(상주) / 탄도에서 누에섬까지

 

 

바람 줄서서 기다리는 곳

바다가 가슴을 쫘악 쪼개어

밑바닥까지 보여줄 때면

눈 반짝이는 말 하나

오래전 건너갈 사랑이었는데

 

설령 건너갔더라도

먼 길 너 혼자 걸어갈 때

몹시 무거웠을 지상의 말은

닳아, 이제 가벼운 노래

나 혼자 부르며 간다

 

저 작은 누에섬이

지금도 먹지 않고 잠도 없이

파도소리로 비단緋緞집을 짓는지

그때 생각하면서

나, 가끔 푸르게 살아있다

 

 


 

김현숙 시인(상주)

1947년 경북 상주시 출생. (金賢淑).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82년 월간문학 등단. 1989 윤동주 문학상 수상, 2019 이화문학상 수상, 중등 교사, 연화주민복지관 도서관 관장 외. 저서; 『유리구슬 꿰는 바람』, 『마른 꽃을 위하여』, 『쓸쓸한 날의 일』, 『꽃보라의 기별』, 『그대 이름으로 흔들릴 때』, 『내 땅의 한 마을을 네게 준다』, 『물이 켜는 시간의 빛』, 『소리 날아 오르다』, 『아들의 바다』 외 다수. 서울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