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주 시인 / 맨바닥
울지 마. 누구나 맨바닥의 기억은 있어. 나 또한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맨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어. 맨바닥은 발밑에만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자라서 스스로 잘 넘어지지 않을 때도 곳곳에서 그것은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들을 하얗게 지웠어. 결국에는 우울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들만 더 많이 남아 거리에는 너 같은 그런 사람도 많아. 그러니 울지 마. 우리 꿈은 삶의 경사(傾斜)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 자, 편안히 맨바닥에 귀를 대어 봐. 짙게 그늘진 네 말들의 그림자를 봐. 그래, 맨바닥일 때 너는 내게 간신히 닿을 수 있었잖아.
이승주 시인 / 위대한 표본책
퍼덕이는 날것들에 핀을 댄다 금세 새 몸으로 몸 바꾸어 날아오르는 날것들의 퍼덕임 도무지 저 퍼덕이는 날것들의 퍼덕임을 온전히 날것으로 표본할 수 없다 뒤바뀌는 꿈처럼 밤새 표본되는 저 퍼덕이는 날것들의 앵글에 찍힌 퍼덕임 표본상자에 빼곡히 들어차는 표본들 표본실을 채우는 탈피의 흔적들
일찍이 제 안에서 퍼덕이는 저 수만 마리 날것들의 퍼덕임을 온전히 날것으로 표본한 위대한 표본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승주 시인 / 비닐하우스 밤기차
산이 강에 들어 강과 산이 아득히 저물면 객실마다 불을 켜고 사방에서 기차들이 모여든다 오래 지켜보았지만 그 기차들이 떠나는 걸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다 기차는 언제나 우리가 잠든 사이에 기적을 울리며 떠났다 잠 깨기 전으로 돌아왔다 은박지처럼 깔린 달빛의 바다를 헤쳐 푸른 기차를 끌고 기관사는 어디로 닿아 왔는지 어디로 돌아온 것인지 잠에게 물을 수 없다 깨고 나면 방울벌레들은 어디 간이역에서 내리고 없지만 깻잎, 풋고추들에게 물을 수 없는 우리들 꿈의 무박(無泊)의 기차 어느새 돌아와 곤한 잠에 빠진 기차 속에서 아침 안개를 헤치고 늙은 기관사 걸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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