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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주 시인 / 맨바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5.

이승주 시인 / 맨바닥

 

 

울지 마.

누구나 맨바닥의 기억은 있어.

나 또한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맨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어.

맨바닥은 발밑에만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자라서 스스로 잘 넘어지지 않을 때도

곳곳에서 그것은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들을 하얗게 지웠어.

결국에는 우울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들만 더 많이 남아

거리에는 너 같은 그런 사람도 많아.

그러니 울지 마.

우리 꿈은 삶의 경사(傾斜)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

자, 편안히 맨바닥에 귀를 대어 봐.

짙게 그늘진 네 말들의 그림자를 봐.

그래, 맨바닥일 때 너는 내게

간신히 닿을 수 있었잖아.

 

 


 

 

이승주 시인 / 위대한 표본책

 

 

 퍼덕이는 날것들에 핀을 댄다 금세 새 몸으로 몸 바꾸어 날아오르는 날것들의 퍼덕임 도무지 저 퍼덕이는 날것들의 퍼덕임을 온전히 날것으로 표본할 수 없다 뒤바뀌는 꿈처럼 밤새 표본되는 저 퍼덕이는 날것들의 앵글에 찍힌 퍼덕임 표본상자에 빼곡히 들어차는 표본들 표본실을 채우는 탈피의 흔적들

 

 일찍이

 제 안에서 퍼덕이는 저 수만 마리 날것들의 퍼덕임을

 온전히 날것으로 표본한

 위대한 표본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승주 시인 / 비닐하우스 밤기차

 

 

산이 강에 들어

강과 산이 아득히 저물면

객실마다 불을 켜고

사방에서 기차들이 모여든다

오래 지켜보았지만 그 기차들이 떠나는 걸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다

기차는 언제나

우리가 잠든 사이에 기적을 울리며 떠났다

잠 깨기 전으로 돌아왔다

은박지처럼 깔린 달빛의 바다를 헤쳐

푸른 기차를 끌고 기관사는

어디로 닿아 왔는지

어디로 돌아온 것인지

잠에게 물을 수 없다

깨고 나면 방울벌레들은 어디 간이역에서 내리고 없지만

깻잎, 풋고추들에게 물을 수 없는

우리들 꿈의 무박(無泊)의 기차

어느새 돌아와 곤한 잠에 빠진 기차 속에서

아침 안개를 헤치고 늙은 기관사 걸어나오고 있다

 

 


 

이승주 시인

1961년 대구에서 출생. 1995년 《시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문학세계사, 2001), 『내가 세우는 나라』(고요아침, 2006), 『위대한 표본책』(서정시학, 201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