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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신율리 시인 / 비 오는 날의 스페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6.

이신율리 시인 / 비 오는 날의 스페인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 들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이신율리 시인 / 모르는 과자 주세요

 

 

아는 과자는 어제 다 사라졌어

달콤한 맛을 알기 전에 사라져서 다행이야

사과는 계모가 다 먹어치웠지 내겐 사과 대신 다크초콜릿만 주고

 

유혹하지 마, 모르는 것은 달콤하지

 

계모를 동그랗게 묶어 마카롱을 만들었어

빨주노초파남보 다음은 분홍이 되는 이상한 나라에서

서로 모르는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거짓말 두 개 넣고

맛없는 크림이 자랄 때까지 과자는 햇살의 공식을 모른다고 했지

 

빵, 터지는 멘토스와 다이어트 콜라 폭발하는 계모가 좋아

 

폴란드초코와플 테니스공껌 턱 빠지는 풋젤리 모르는 과자 주세요

 

쓴맛도 알고 싶어?

쓴맛이 아는 과자를 안다고 먹고 칡촉

아는 과자가 모르는 과자를 모른다고 먹어치워 악마의 잼 누텔라

 

계모의 주머니가 깊어지고 있어

아는 과자만큼 손목이 따뜻해져 거울아 거울아

 

주머니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츄파춥스 일곱 가지 맛을 빨면서 모르는 과자를 찾아가지

 

 


 

이신율리 시인 / 바삭바삭 서커스​

 

 

 코끼리가 귀를 펄럭거려요 귀찮은 파리 때문에 얼른 날아야겠어요 믿지 못한다면 엘레판타 아일랜드로 돌아가세요 몸무게는 별 상관없어요 코코넛을 깨고 건강하게 번지는 점프

 

 달걀 침낭에서 빠져나와 가볍게 돌아보는 텀블링은 탄력 있어요 멜론 한 통 먹고 힘내서 천막 높이까지 날아보겠어요 환기통은 멀리 있네요 바닥이 아찔하게 미는 바람에 노른자에 다리가 빠졌어요 줄넘기 포즈로 벌써 일어났죠 휘파람 소리 맞춰 기침을 했어요

 공짜인가요

 

 아찔할 때 그때 길을 끌어당기는 중이에요 길을 줄여야겠어요

 

 말 안 듣는 원숭이를 제쳐두고 외줄을 탈 차례예요 바삭바삭 서커스 초반부터 반응 괜찮아요 소문을 닫고 수다스러웠던 발바닥이 조용해지길 기다려요 허수아비처럼 서 있으면 안 돼요 부채를 펼쳐 집중해야죠 바람 소리가 들리네요 자세를 수정할게요 뒤뚱거리는 눈빛 위를 건너와 손을 번쩍 들어 올렸죠 박수 소리가 제법 커요 다음번엔 두 바퀴 도는 텀블링을 선보이겠어요 부채가 접히질 않아요

 

 헛소문을 넘기듯. 뒤꿈치를 든 평발이 줄을 끌어당기고 있어요

 


 

 

이신율리 시인 / 오늘까지만 1900원​

 

오늘까지가 서쪽까지란 말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상력입니까 은밀합니까 셀 수 없는 숫자면 어떻습니까 오늘에 동전 파스를 붙였습니다 습관입니까 커피 우유를 마시겠습니까 불을 끄겠습니까 미래입니까 이럴 때 부는 바람을 편서풍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부추는 밤에 자랍니다 이곳엔 아무도 자라지 않습니다 야홉 번 밤을 베어내면 봄날이 가는 걸 아십니까 유기농의 불편한 진실과 무농약은 생각이 같습니까 베이킹파우더와 사과 식초는 왜 다른 저녁입니까 구름을 튀겨 보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때 염소 구름이면 안 됩니까

 

일곱 시를 이쪽으로 옮겨 심어도 되겠습니까 딱 세 번 꾼 꿈처럼 붉어서 말이 없습니다 체한 것이 가라앉았을 땐 어떤 음식이 생각 납니까 토마토를 올리브유에 볶으면 자장면 냄새가 납니다 숲에서도 자장면 냄새가 날 때가 있습니다 무알콜 칵테일이 콜라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단맛 속에 포함된 산 버찌가 익을 무렵입니다

 

한강과 저녁의 발음이 같은 것처럼 다가옵니다 일곱 시에 불을 켜는 가로등은 일곱 시를 알겠습니까 책을 펴겠습니까 난간 사이를 지나는 환절기 코드가 맞지 않는 흑백을 기억하겠습니까 어둠을 잊고 사는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추 꽃으로 부케를 만들면 나비가 쫓아오겠습니까

1900원만큼 오늘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신율리 시인 / 취미생활 주스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면서 인형 뽑기를 해요

콩순이 왼팔이 걸렸어요 주스를 쏟았어요

주스 속에서 뽀로로가 자라나요 누드예요

포르노로 부르지 마세요 마법인형은 없어요

 

앵콜을 받은 곰 뒤로 인형이 쌓여요

 

나를 닮은 여우를 뽑는 시간은 터널을 지나 세 발자국

 

코발트빛으로 영양소를 계산하는 오만주스를 생각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이어트의 재료는 요요의 취미생활

 

물컹한 공식이 나를 제치고 세 번째 나를 계산할 때

도로시주스를 마시고 초록을 뱉어내요

 

오렌지 알갱이는 이쪽에서 반짝거리기 좋아 저쪽으로 옮겨가고 샐러리 손목을 오려내 테이블이 풍성해요

 

브로콜리 양배추 혼자 남은 날엔 해독주스

맛없는 재료가 바깥에서 바깥으로 넘쳐나요 앵두 버튼을 눌러주세요

원숭이를 언니라고 부르는 아기는 두뇌 성장주스를 마시고

팔다리가 길어져 묶었던 구름을 풀어주고 있어요

 

예상 문제와 마법의 인형을 믹서에 돌려

파인애플 한 조각을 여섯 시와 섞으면 엘리스의 아침

깜짝 놀랐어요 소속이 어딘가요 이상한 나라

 

휴일에만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신비한 주스 주세요

 

 


 

이신율리 시인

충남 부여에서 출생.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악학과 국악과 졸업.. 2019년 제8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