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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영란 시인 / 그리운 금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6.

강영란 시인 / 그리운 금능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마을에 간다

 

고흐의 그림 속 반짝이는 별들은 다 이곳에 있었구나

생각을 하는 사이 모르는 사람이 반짝 지나간다

 

불칙이

옛날에는 광명등을 켜는 사람을 그리 불렀다는데

그 불칙이가 되어 반짝 바다에 불을 켜면

옛날에 옛날에부터 그대 마음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을까?

 

금능에 사는 그가

발개진 얼굴로 달려와 양배추를 심느라 늦었어요 말한다

촘촘하게 풍겨오는 야생 양배추 냄새

 

양배추는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에서 살던 식물인데

그에게서 지중해 어느 작은 마을 바다가 찰랑거린다

금능이 찰랑거린다

 

보름이어도 그믐이어도

돌담에 얹히는 나직한 바람

 

어느집 마당에선 브로콜리 꽃도 필 것이다

저물고 있는 이 저녁에는

 

Mook『서귀포문학』 32집 발표

 

 


 

 

강영란 시인 / 쌀뜨물이 가라앉는 동안

 

 

쌀뜨물이 가라앉는 동안 나는 어느 먼 산에 어스름이 가라앉는 걸 바라보는데

 

이윽고 그 산이 어둠에 완전히 잠길 때 생기는 침전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인데

 

쌀뜨물이 가라앉는 동안 물 위에 뜬 검은 쌀 서너 알갱이가

 

산 위를 고즈넉이 날아가는 까마귀 날갯짓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목련 꽃잎 같은 쌀뜨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목련꽃 한 그루가 저녁 어스름에 서서히 물들어 가는 거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데

 

그대여 그대는 나를 어떻게 물들이는가 나는 그대를 어떻게 물들이는가

 

쌀뜨물이 가라앉는 동안 나는 침전물에 대해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인데

 

그대에게 침전되어 가는 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인데

 

시집『염소가 반 뜯어 먹고 내가 반 뜯어 먹고』(문학의전당, 2017)

 

 


 

 

강영란 시인 / 꽃의 끓는점

 

 

  기름의 끓는점에 반죽을 떨어뜨린다

  지글지글 튀겨지며

  확확 피어나는 꽃들

 

  세상 모든 꽃들은

  끓는점에 필사적으로 핀다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면

  내 몸의 끓는점도 지금

  확확하다

 

시집『염소가 반 뜯어 먹고 내가 반 뜯어 먹고』(문학의전당, 2017)

 

 


 

강영란 시인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년 《열린시학》  봄호 신인상 등단. 저서로는 시집 『소가 혀로 풀을 감아 올릴 때』, 『염소가 반 뜯어 먹고 내가 반 뜯어 먹고』와 시,산문집 『귤밭을 건너 온 사계』이 있음. 제 5회 서귀포문학상, 제 1회 제주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