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식 시인(금산) / 시간의 블랙홀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오른다 시계는 눈을 감는다.
그림처럼 걸려있는 객실 앞 숫자판은 종착역 현재 시각을 중얼거리고 있다 6박7일간의 고독한 옹아리를 한다
지금 시각 밤 12시 30분 당고개행 전철 막차가 끊겼습니다. 차창 밖 드넓은 시베리아 대평원에 눈부신 햇살 이토록 가득한 대낮인데 밤 12시라 하니 부질없는 그 넋두리 들으나마나 당고개행 전철 막차가 끊기거나 말거나
아침 6시 모닝콜 오늘은 월요회의가 있는 날, 출근 서두르세요 차창 밖에서 노닐던 백야가 이제 막 어둠을 뿌리기 시작하는데 아침 6시라 하니 그 넋두리 들으나마나 월요회의가 열리거나 말거나
숫자판은 나를 조종하고 있다 오늘 점심은 먹었냐고 묻는다 언제부터 오늘이고 언제까지가 어제였는지 오늘과 어제의 경계선을 모르는 나는 그 물음의 답을 찾지 못한다 지금 먹고 있는 이 햄버거가 아침식사인지 저녁식사인지 정말 모른다
배가 고프면 먹는다 졸리면 아무 때나 잔다 오늘 하루 몇 끼를 먹었는지 몇 시간을 잤는지 신경 곤두세워 헤아리는 것은 부질없다 그것은 마치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늘어선 철도 옆 전봇대 숫자를 헤아리는 일과 같다
시베리아횡단열차 객실 숫자판은 내 손목에 시간의 수갑을 채우려한다 손목시계 벗어 던진 내 손은 자유롭다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내 손은 행복하다
김흥식 시인(금산) / 봄꽃 피우기
겹겹으로 못질한 상자 긴긴 어둠의 자물쇠를 푼다 연다 젖힌다 무너뜨린다 맑은 수액(樹液)을 뽑아 올린다
나팔을 분다 환희의 노래 하늘 높이 쏘아 올린다 허공에 뿌려진 무수한 멜로디 일제히 나비가 된다
하늘 가득 떠다니는 노란 풍선 나비는 따스한 구름이 된다
아픈 가슴 속의 차가운 고드름 하나 녹아 내리면 용서의 눈물이 겨울견문록을 적시고 그제사 빈 가지에 노란 봄꽃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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