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숙 시인(은월) / 어쩌자고 꽃
앞서서 오는 꽃보다 뒤에 오는 꽃이 더 아름답듯 과거로 가는 것은 아프고 미래로 가는 것은 떨림이다
오늘 한 발짝 떼어 보는 발걸음 앞에 어린 싹이 밟힐지 모르니 발밑을 보고 내일의 신발을 신을 때 발밑에 씨앗을 보라
꽃을 피운다는 것은 모두 가슴 떨림
김혜숙 시인(은월) / 아버지의 흰 웃음
흰 바람결 날리는 주막집 아버지와 아버지의 전대를 기다리는 언덕
막걸리 한잔에 세상 다 좋다 하시는 막걸리 같은 시큼털털한 삶
아버지는 흰 바람벽으로 흰 적삼 풀어 헛웃음으로 하얗게 웃다 가셨습니다
김혜숙 시인(은월) / 호두를 두들기는 여자
밤마다 몰래 도깨비 방망이질을 한다
곱씹고 곱씹은 낱말은 호두 속에서 널브러지고
고랑을 타고 도는 내 언어들이 들어차 구린내를 풍긴다
쭉정이와 가라지가 분별없고 대책 없는 천식 걸린 기침 무시로 터져 나온다
몸부림치며 뱁새눈을 프고 서로 노려보던 사투 끝에 조각난 낱말
늙은 여자의 주름은 호두 속에 고랑 틈에서 허망하기가 그지없다.
김혜숙 시인(은월) / 살아가는 발걸음
달팽이를 본다... 배춧잎에 슬슬기어가는 산목숨 저렇게 우린 살아왔으리
가끔 참새가 휙 지나가며 짹, 외마디 할 때 철렁이는 순간의 날숨
비라도 한줄 내리면 재촉이며 걷는 발소리가 점점 심장 박동소리와 같이 가슴팍으로 달겨드는 들숨
저녁 노을에 황혼빛이 곱게 물드는 저들도 하늘 위를 걸어서 저기까지 다 닿을 때 얼마나 총총대고 갔으리
그러나 달팽이는 배춧잎을 갉아먹고 숨어있다 우연히 내게 와버린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
삶이 기어가던 뛰어가던 누워 자던 덧없이 내려가든 그저 살아가는 발걸음은 종착에 이르러 내 쉴 곳을 찾게 되는 것은 끝내 배추잎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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