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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승현 시인 / 춘화현상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19.

서승현 시인 / 춘화현상

 

 

바닥까지 말라붙었던

공원 수로에 물이 흐른다는 것은

노란 창포꽃이 피었다는 뜻

봄이 와도 꿋꿋하던 당신이

기어이 눅진한 이별의 강 건너갔다는 것

한 시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꽃빛깔

환하게 열어 줬다는 것과 같다

 

다가 올 때 떠날 것 미리 알고 있었지만

영하의 시린 쓰라림 앞에서도

이별을 애써 망설이던 당신이

문득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바람결에 부드럽게 내비친 것은

어둡고 추운 시간 견실하게 지나야

슬픔의 수량 풍부해지고

젖은 꽃빛 더욱 곱다는 걸 확인하기 위한 것

비밀스레 꽁꽁 싸매두었던 함초롬한 치맛자락

봄볕 아래 흔연스레 펼쳐 보라는

당부의 어루만짐이었던 것

캄캄하게 얼어붙은 마음 외면하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았던 시간 비로소 떨치고

떠남이 오히려 진한 사랑이 되는

늦겨울과 늦봄의 변주곡

그 한가운데 노란 창포꽃 피고 또 진다

 

 


 

 

서승현 시인 / 동지 팥죽

 

 

파-앗 ~!

 

동지의 캄캄한 가슴에

적중되는

부활의 신호탄

 

검붉게 어우러져

온 몸 환해지는

해돋이빛

온기 한 그릇

 

 


 

 

서승현 시인 / 유효기간 만료

 

 

프로이트가 지그시 내려다보는 책장 건너편

기왓장에는 그리다만 흰 매화 꽃봉오리에서

삼겹살 굽던 냄새가 부글거리며 흘러내리고

꽃길만 걷자며 비틀대는 캘리그라피 액자에는

물 바랜 청수국이 약속을 체념한 채

바스스 흩어진다

 

당분 가득한

신의 향기를 배달해 줄

미네랄 스쿠터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소소하게 피어나던 옛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도

폐차 직전 엔진처럼 붉은 녹이 슬고

허공에 박제된 채 낡아가는 은청빛 나비 날개

 

넌 인생 4막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거니?

이드* 가든에 새로 입성할 그 무엇은 무엇이니?

창백한 원숭이처럼 늙어버린 60갑자 갱신한 여자가

지난밤의 불면을 툴툴거리며

살균청소기로 구겨진 침대를 문지른다

 

인터넷 뉴스에서

 

콧구멍이 찌그러지도록 키스 하고 있는 남녀는

지구상 가장 힘센 나라의 노老대통령 부부

부국**(富國, 父國)을 쫓는 슈퍼에고(superego)는

오늘도 무사하게 쪽! 쪽! 쪽?

 

힘없이 오글거리는 쾌락의 진딧물을

토드의 망치***로 쿵쿵 내리쳐 본다

 

* 이드: 개인의 무의식 속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 에너지의 원천

** 부국: 이상 국가.

*** 토드의 망치: 잠재능력을 다른 것에 몰아주기 할 때 쓰는 게임 아이템

 

 


 

서승현 시인

강원도 태백에서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전남대 대학원/ 동신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1년 《시와 사람》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푸른현호색꽃 성채에 들다』가 있음. 제2회 전국가사 시조창작대회 대상 수상. 현재 광주대 겸임교수 및 동신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