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순 시인 / 느낌적인 느낌
봄 그림을 안고 잠이 들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꿈인지도 모른다 섬? 썸? 탈까? 의심과 확신 사이로 바닷물이 몇 번씩 교차했지만 봄은 기적을 울리지 않았다 일어나지도 않았다나무가 떼창으로 봄 처녀를 불렀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정거장에 가는비도 내리지 않았다. 눈꽃에 취해있는 도시 총각들은 쌀쌀맞았고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지 않았다 숲은 우거지지 않았고 만물상은 언제까지 문을 닫고 있었다 투쟁이 투쟁을 나았지만 액자 속의 봄은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늪과 배추포기와 데자뷔, 저기 섬 밖에서 섬을 마주 보는 이 누구인가 그림자인가 랑데부인가 갈피와 갈피 사이로 섬이 떠다니고 있었다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철 길은 안개로 불투명했고 기차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지만 줄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기적은 반드시 일어 날 거야, 머잖아 파도가 섬을 데려올 거야, 곳곳에 봄 그림이 무성했으므로 손과 손이 나란히 따뜻했으므로 난 무작정 릴켈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이미 안개를 뚫고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봄 역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시 산맥>2019년 가을호
강윤순 시인 / 블랙 아이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흔들린다 자동차는 자동차로를 그대로 달리고 점멸등은 한자리에서 눈만 껌뻑이고 서 있다 돌다리는 돌다리일 뿐 걸어가지 않는다 간혹 암호처럼 유리빌딩에 차창이 뱉어 낸 빛이 획을 긋고 지나간다 아스팔트에 섞여 있는 시치미 없는 비둘기의 발자국, 반대를 위한 반대는 찬성을 가장 한 리액션이다 '누가 검은 탈을 쓴 가장행렬에 박수를 보내는가요'
고련잎이 설탕물에 잠겨 있다 썩은 준치 포장품에 횟감이라고 적혀 있다 '저 사과상자 안에 있는 게 머니?' '뭐니뭐니 해도 매직 쇼는 카드 놀음이 최고지' 눈을 위장한 누이 눈앞에서 설친다 흑청색 날치 떼가 해면 위로 날아오른다 눈을 꼭 감은 뻐꾸기가 개개비 둥지 안에 알을 낳는다 "철 그른 동남풍은 휜 소리가 적당해" 검은 둥지에 깔려있는 얼음, 반짝인다고 모두 보석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 『시산맥』 2012-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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