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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겸 시인 / 꽃들도 때가 되면 떠난다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19.

정겸 시인 / 꽃들도 때가 되면 떠난다

 

 

허리 굽은 초로의 사내 검정가방 옆에 끼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걸어간다

 

잠시 멈추고 길 옆 화단을 본다

채송화 봉숭아는 사라지고

금계국 메리골드 페튜니아 낯선 꽃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모르는 사이 꽃들의 세계도 주인이 바뀐 것이다

 

사내가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한 장 두 장 따더니

길모퉁이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다

젊은 날 함부로 대했던 푸른 잎사귀들

머지않아 탈색 되어 추락의 고통 속에서 신음 할 것이다

 

자꾸만 느려지는 걸음

휘청거리더니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는다

먹이를 찾던 늙은 길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낡은 의자를 수레에 싣고 가던 노인이

잠시 서 서 먹이를 꺼내 길고양이에게 건네준다

눈을 끔벅거리며 온기를 뿜어내는 길고양이

노인도 눈을 끔벅거린다

 

탄력을 잃어버린 햇살이 빌딩 벽에 부딪히고

현관문밖에는 낡은 의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오랜 세월 나를 지탱해 주던 저 의자

삐걱거리며 마찰음 날 때마다 심장을 쿡쿡 찌르던 웃음들

버려진 의자위로 나뭇잎 떨어진다

어둠속에서 낙엽을 긁어모아 조용히 수습하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4월호 발표​

 

 


 

정겸 시인

1957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경희대대학원(사회복지학과) 졸업. 2000년 《세기문학》, 200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공무원』(한국문연, 2010)이 있음. 2004년 공무원문예대전 시부문 행정자치부장관상. 2009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