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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순진 시인 / 봄에 안기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19.

권순진 시인 / 봄에 안기다

 

 

천지가 온통 새순으로 돋는 걸 보면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

나무가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여는지

샛강에 가라앉은 돌멩이의 숨구멍은 어디에 붙었는지

꽃들은 왜 이 봄에 앞 다투어 피고 지는지

그 꽃들의 눈망울을 보면 사람들의 꿈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도 다 알 것 같다

 

3월 꽃순이 마음이 저리 너르고 곱다

겨우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는데

이리오라 손짓하며 가만 안겨보란다

욱신거리는 영혼의 근육통에 꽃잎 파스 한 장

살짝 붙여주겠다 한쪽 눈 깜박거린다

 

그래도 얼른 안기지 못해 서성대는

많이 녹슬고 말라비틀어진 가난한 영혼

조건 없이 받아주리라 믿긴 하였어도

주저하는 내 어깨위로 오늘은 후드득

하얀 꽃잎 무더기로 세례한다

 

 


 

 

권순진 시인 / 피안의 새

 

 

새장 안의 새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상호간 민망한 일이다

작은 구멍 하나 내어주지 못하는 처사는

서로 가련하고

새의 눈이 가슴에 와 박혀

손바닥만큼 그물을 벗겨낼 때

얼른 날아가 주지 못하는 새를

바라보는 몇 초 동안은

나도 새와 함께 불구가 된다

절름발이 앵무가 된다

 

 


 

 

권순진 시인 / 낙법落法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할 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메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안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등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은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권순진 시인 / 가을편지

 

 

지난밤 옹골차게 퍼붓던 비로

강은 방죽 어깨까지 불어나고

강물은 온통 가을 색으로

사람 뜀박질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바다 해수욕장 간이 천막은

접혀진지 한참이지만

8월의 달력은 오늘에야 찢겨져 나갔습니다

한동안 여름 속의 가을 인지

인디언의 여름이라고 하는 가을 속의 여름 인지

어정쩡한 망설임도 이젠 안녕입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사람들은

반소매 차람의 보행이어도 탈 없고

둔한 매미는 귓바퀴를 도는 이명으로 남아

우리들의 지난 여름을 추억케 할 것이며

성가신 모기는 노련한 테러리스트처럼

여전히 우리의 붉은 피들을 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 있게 가을이라 말합니다

잎이 꼭 발갛게 물들었다거나

하늘이 유난히 높아져서가 아니라

문득 먼 곳 상류의 강물처럼 흘러와

그립고 생각나는 사람 몇몇

오늘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걸 보면

가을은 정말 가을인가 봅니다

 

키 크고 어깨 넓은 사내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고 싶다던 인경이는

차인표 같은 남자를 만나 잘 살고 있기나 한지

그렇다면 지금도 그 팔뚝의 근력은 건재한지

혹시 하중이 많이 불어난 탓에

맥없이 고꾸라지고 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여름만 되면 그 지독한 겨드랑이 땀 냄새로

시집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내내 우울했던 그러나 착하디 착한 순희는

소원대로 여름 한철 사람들과 덜 마주쳐도 좋을

선생님이 되어 있는지 행여 그깟 땀샘 탓에

지난 여름을 우울하게 지냈던건 아닌지

 

영화배우가 되고싶다던 문방구집 아들 석하는

썩 잘난 얼굴이 아니라서

브라운관에 가끔 쿤 얼굴로 슬쩍 잡히기만 하여도

원 없이 기쁘겠다며 빛나는 조연을 소망하였는데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만날 수 없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궁금합니다

 

에스법대 출신 교수로 명망 있는 시민운동가로

그러면서도 나 같은 어리벙벙한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려 소주 께나 나발 불었던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죽고 없는 현직이는

어느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헤메고 있을지

아니면 자유와 정의의 맑은 땅 위에서

가랑비 흐뭇하게 온몸으로 맞고 있을지

그의 근황이 몹시도 궁금합니다

 

그 친구들 말고도 이 가을은

많은 사람을 생각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 전하고 싶고

수줍고 어눌했던 내 지난 모습과 더불어

그리다 만 사랑의 물감 재료가 굳어진 채

엉겨붙은 양철 팔레트로도 추억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웠으며

그때는 참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많이 보고 싶고 지금은 더 많이 참고 있다고

 

 


 

권순진 시인

1954년 경북 성주 출생, 2001년 《문학시대》로 등단.저서로는 시집으로『낙법落法』 『낙타는 뛰지 않는다』와 시해설서『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詩』가 있음. 계간『시와 시와』 편집주간, 대구일보 객원논설위원. 대구일보에 10년째 시 칼럼 연재 중. 제12회 귀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