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희원 시인 / 폭풍흡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19.

이희원 시인 / 폭풍흡입

 

 

나는 흡입한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차창 밖 굉음을

 

간판과 먹구름을

무가지와 전광판의 광고를

나는 채워진다

 

한자와 로마자가 빨려온다

아라비아숫자가 섞여온다

문자 속, 말들이 따라온다

 

좁은 공간을 타고 그녀가 온다

그녀의 산이 오더니

그녀의 바다가 쫓아온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고

그녀의 입술을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나는 돌진한다

 

과부하가 걸린 내 머리는 폭발하고

그녀의 말 한 마디도 붙잡지 못한다

한때, 그녀가 나를 흡입한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은 늘 저밖에 있고

“난 내 빵 어느 쪽에 버터가 발려있는지 모른다”*

 

*하워드 제이콥스의 소설 "영국남자들의 문제”에서 인용

 

 


 

 

이희원 시인 / 에코*가 사육하다

 

 

 천산북로를 따라 실크로드를 넘는 길이었다. 모래바람이 누란의 고성을 날마다 메우고 있었다. 거기 그녀가 사막여우처럼 쪼그려 앉아 별을 세고 있었다. 산이 솟아나자 골바람이 따라왔다. 나는 그녀를 막 모래로 돌아가려는 돌 하나와 배낭에 담아왔다. 그녀는 말을 먹고 자랐다. 나는 날마다 그녀의 밥그릇 가득 말을 쏟아 부었다. 말을 먹고 사는 다른 것들처럼 그녀는 나날이 부풀어 올랐다. 가끔은 그녀의 입에 족쇄를 채우기도 하고 그녀의 귀를 전봇대로 막기도 했다. 그러자 그녀는 갇힌 방 안에서 저들만의 울음으로 동료들을 규합했다. 이 도시에 그 많은 에코들이 있었다니? 사람들이 떠난 밤의 텅 빈 도시를 그들은 사육하고 있었다. 아침인사처럼 우리는 밤새 부풀어 오른 낯선 에코들을 오늘도 만난다.

 

 나는 고작, 한 여자에게서 꺼내온 울음 하나를 쌀쌀한 봄날, 이 도시에서 영구 추방한다.

 

*그리이스 신화의 요정

 

 


 

이희원 시인

경기도 파주 출생. 대학에서 법학 공부. 국영기업 및 사기업에서 장기 근무. 2007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코끼리무덤> 이 있음. 공동 시집 『오거리』 제3의문학,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