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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대호 시인 / 휘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19.

김대호 시인 / 휘다

 

 

부서지기로 했지만 휘었다

언젠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지만 남루한 외투를 걸치고 걸어올 당신이 누군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많은 시련의 출처를 기록한 쪽지를 내게 건넬 것이다

"왜 이토록 잔인한 임무를 당신이 수행하나요"

"내가 당신을 가장 잘 아니까"

슬프고 기뻤지만 그 모든 일이 주술의 힘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죄

휠 것을 알면서 부서지겠다고 고백한 죄

모든 것이 흘러간 뒤 흘러간 그 모든 것을 복기해서 분류하는 수고가 길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넘어올 때 봉합된 부위가 있었다

그 자리가 수시로 아리다

무엇을 덮고 덮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봉합된 무덤들을 살짝 들추면 생살 냄새가 난다

아직 살아서 휘어 있다

압력은 세월이었다

아니다 나다

 

 


 

 

김대호 시인 / 어둠의 원본

 

 

어둠이 빛나는 한낮을 지나

어둠의 원본이 드러나는 밤이 온다

한낮에는 온갖 빛나는 것들 때문에 어둠이 훼손되었다

그 훼손된 한낮에 더듬거리며 일을 하고 더듬거리며

당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당신의 눈빛은 밤과 잘 어울린다

밤에 만나는 당신의 허연 목덜미는 참 매혹적이다

나는 당신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당신은 빛에 찢어진 목청을 보수하느라고 가글을 한다

모든 영업이 끝난 이 밤에

밤의 속살을 얻기 위해 고요한 영업을 시작한다

아무것도 빛나지 않기에 당신의 음영이 뚜렷하다

사람이여

사랑이여

이 밤이 나의 최초라는 것을

이 밤이 나의 우화라는 것을

통속적인 것을 지나 아주 진지한 통속의 새벽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김대호 시인

1967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2012년 상반기 《시산맥》 신인상 당선. 시집으로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걷는사람, 2020)이 있음. 2019년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