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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루비 시인 / 둥근 봄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0.

김루비 시인 / 둥근 봄날

 

 

마을에 비도 오지 않았는데

 

암퇘지 또 배부른 집은

살구나무 우산

공소 종소리 구르는 집엔

벚나무 우산

뒤주 바닥 긁히는 집엔

자두꽃 우산

혼기 놓친 여자 저물어가는 집엔

복사꽃 우산

줄줄이 아기 울음인 집엔

앵두꽃 우산

 

집집마다 우산이 가득하다

 

 


 

 

김루비 시인 / 화가의 얼굴

 

 

무수한 금빛별이

가루가 되어 물 밖으로 내민 얼굴

빗물에 씻기고 씻기어

눈 코 입 다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물을 박차고 뭍에 가두어지기까지

천년의 세월 속에서

산화로 가벼워진 몸피

이름이 이름에 닿으려던 몸부림

회룡포에 이르렀구나

 

흘러오며 보았던 풍경들이

마음결을 문질러 주어

모래는 저렇듯 부드러운 미소다

 

내 단단하던 오기를

산산이 부숴 줄 물은 아직도

용의 몸통 흔들리는 비늘

금빛 가루를 흩뿌리고 있다

 

 


 

 

김루비 시인 / 겨울달궁

 

 

달이 머물다 떠난 밤 지리산에 들면

울림통 단단한 달이 된다

바람이, 낙엽이, 풀벌레가 둥글게 뭉쳐지는 화음에

달빛 흐르는 산길은 현악기 연주자

수천 년 은빛 물결 같은 산길마다 돌탑

오고가던 허공의 말은 돌멩이로 얹히고

이슬을 허물어 말리기도 하는 바람은

꺾인 나무의 팔로 나를 콕콕 찌른다

살아서 걸을 수 있는 동안에는 다시 오라는 달궁

천년의 연리목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마른 혀 간절한 말들의 성찬

저도 탑인 양 하늘만 바라보고 섰다

잎 새 다 떨구고도 빌고 비는 손바닥

달빛 커튼을 배경으로 내리던 눈발 속에서도

넘어지면 일으켜주던 사랑은 어디로 갔나

 

달궁이 미끄럽다, 돌아갈 길 앞에서

귀 세운 산짐승처럼 외로워졌다

 

 


 

김루비 시인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졸업. 2016년 계간 《문장》 신인상 등단. 시집 『빨간사과는 열쇠 가게다』가 있음. 대구미술가협회, 대구시인협회회원. 형상시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