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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광임 시인 / 얌전한 사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0.

최광임 시인 / 얌전한 사람

 

 

 한겨울 돼지 다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 정주간에 걸어 놓고 베어 먹던 원주 시절, 겨울날 저녁 불 때는 연기가 산 아랫마을로 내려가고 오래된 사람들처럼 수염을 달고 술을 마시면 산짐승이 어슬렁대다가 돌아갔다. 어떻게 건너왔을까? 노린내가 진동하는 너구리를 삶아 절절 끓는 방에서 눈을 희번덕이며 굵은 소금에 찍어 서로의 입에 넣어주던 거칠고 부드럽던 시간, 얌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서럽다. 눈이 수북수북 쌓이던 저녁나절 바라보던 앞산처럼 의젓하게 또 한 해를 맞고 낯선 이방의 땅에서 먼 곳을 그리워하나 보다.

 

 


 

 

최광임 시인 / 다시, 평사리

 

 

야윈 곳간이 늘 문제였다

비우면 언젠가는 채워질 거라는 말은

꽃이 피면 다시 올 거라는 말처럼

헛된 것이라서 쓸쓸했다

 

날이 저물면 저녁이 찾아들 듯

날이 새면 어김없이 오르던 평사리 一 行

늙은 자동차도 길을 다 외워 차도 나도 편안했던

평사리 一 行 이십여 년

 

이젠 늙어 기다릴 사람도, 받을 기별도 더는 없어

빈 곳간들을 사람으로, 문장으로 채워놓고

 

내 언젠가는 최참판댁 솟을대문을 등 뒤로 두고

개차나루 쯤에서 나룻배 하나 얻어타고

흐르듯 떠나가겠지

 

나는 늘 평사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이제 평사리가 나를 기다려도 좋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평사리 一 出

 

 


 

최광임 시인

1967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출생. 대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도요새 요리』가 있음.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현재 반년간『디카시』 편집위원, 계간『시와 경계』부주간. TJB FM 《해피투게더》금요 게스트-<최광임 시인과 함께 하는 감성놀이? 공감놀이-길 위에서 만나다>. 계간<시와 경제> 부주간. 창신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