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일 시인 / 미풍해장국
사무실 앞 미풍해장국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제 밤부터 불이 꺼져 있더니 오늘 낮까지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문 닫힌 한낮의 식당 안을 들여다보는 건 왠지 섭섭하고 걱정이 드는 일입니다 해장국의 뜨뜻하고 뿌연 김이 가라앉은 식당에선 유리문 사이로 서러운 비린내 같은 게 새 나옵니다 옆 건물 콜센터의 상담원 처녀들이 늦은 밤 소주 댓 병과 함게 뱉어낸 고객님들의 악다구니와 욕지기들도 식당 바닥 찬물 위에 굳은 기름으로 떠 있습니다 의자와 정수기와 도마와 탁자와 계산대는 다들 앞길이 막막하다는 표정으로 그늘 속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주인 내외가 무슨 상이라도 당했으려니 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너무 슬픈 나머지 쪽지 하나 붙이고 가는 일 깜빡했으려니 짐작하면서 하루 이틀 더 기다려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초여름인데 벌써 공기가 후줄근합니다 미풍이 좀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콜센터 아가찌들에게도 해장국집 착한 부부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바람이 좀.......
오성일 시인 / 마지기
'평' 말고 '제곱미터'를 써야 한다지요 벌쩌 한참 전부터 그랬어야 한다지요
그런데 어쩌나요 난 도무지 '제곱미터'론 가늠이 안 되는 걸요
그도 그럴 밖에, 한 번도 '제곱미터'에 몸 달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넓이는 눈금이 아닌 몸이 아는 거예요
스물네 평은 좀 옹색하고, 서른 세 평은 숨 좀 쉴 만하고 마흔한 평은, 왠지 휑한데도 생각하면 신이 나지요 어떤 시인이 쪼개어주겠다던 심만 평 동해바다는 또 어떻구요
그래요, 넓이는 몸이 알아요
내 아버지의 등짝에 젖은 노을 한 마지기처럼 넓이는 몸에 깃든 기억이어서
넓이에 몸이 먼저 웃고 울어요
오성일 시인 / 아무르
어디가 초원이고 강과 호수인지 분간이 안 되게 대지에 눈이 덮여도 괜찮아요 아무르는 살 만해요 가으내 거두어둔 건초 더미가 있어서, 말들은 건초를 먹고 사람들은 마유를 먹지요 타이가의 침엽숲엔 늑대와 가젤 표범과 순록이 살고, 고니와 두루미는 쿠릴로 캄차카로, 물범과 연어들은 오호츠크의 한류로 가서 죽지요 아무르의 겨울은 살 만해요 칼끝의 눈바람에 발갛게 볼이 언 채 아무르는 죽을 만해요 당신들의 땅에는 어떤 정령들이 숨 쉬어 사는지요 건초 더미도 없이 마유도 없이 밤짐승들의 혼백 시린 울음도 없이 당신들이 사는 그곳을 살 만한지요 살다가 죽을 만한지요.
오성일 시인 / 촛불
촛불의 밝기가 몇 촉인지 나는 모른다 촛불의 마음이 몇 도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촛불에 대해 아는 게 있다 촛불은 다른 불과 다르다 촛불이 다른 불과 다른 건 흔들리기 때문, 어둠을 뒤흔드는 그림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로 땅을 흔들기 때문이다 촛불은 눈물을 모았다가 흘릴 줄도 안다 나는 그 눈물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나보다 먼저 놀라서 내 손바닥 안에서 굳어지던 촛불의 눈물, 하여 나는 촛불을 똑바로 세워 드는 습성을 배웠고 사람이나 촛불이나 꼿꼿한 자세 속에는 눈물을 사르기 위한 수평의 안간힘이 있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촛불이 무서운 건 다른 게 아니다 그 안간힘, 그 꼿꼿한 견덤이 무서운 것이다 수직의 분노가 옮겨붙는 저 거대한 수평이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 촛불은 바람 불면 번진다
오성일 시인 / 힘껏
아침 일곱 시 적십자병원 앞 주상복합빌딩 신축 공사장 출입구 쪽, 폐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의 리어카가 과속방지 턱 앞에서 주춤하지 하연 헬멧을 쓴 공사장 신호수가 들고 있던 빨강색 형광 지시봉을 냉큼 겨드랑이에 끼고 힘껏, 밀어주는 걸 코에 투명 줄을 꽂은 환자복의 노인이 푹 꺼진 눈으로 힘껏, 웃으며 건너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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