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발 시인 / 문은 시선이다
그는 기차를 타고 있다. 문 너머 퍼즐 조각 같은 자잘한 논과 밭이 보인다. 식칼 같은 햇볕이 문틈으로 깊숙이 찔러 들어온다. 햇볕이 땅을 밟고 있는 시선과 마주친다. 그는 문의 시선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서로 다른 문이 마주 보고 있는 길이 보인다. 문이 닫히면 문 뒤로 손 흔드는 사람 보이고, 열리면 보이질 않는다. 문이 열리자 회색빛이 너울대는 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 웃음을 참는 사람이 허그를 하고 있다. 문이 등을 보일 때는 우는 사람 내보내고, 가슴을 내밀 때 웃는 사람 내보낸다. 그는 문 등에 올라탄 것도 아닌데, 흙을 밟은 것도 아닌데, 그는 한번 열리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 앞에 서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처럼.
-시집 『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에서
이위발 시인 / 봄날은 간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의 나른함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적당한 술잔에 애틋함을 담아
가랑비가 솔솔 내리듯 여인이 나폴나폴 움직이듯 취중은 장자인지 나비인지 모를 몽롱한 꿈을 꾸듯
사람이 사람에게로 가는
-시집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中에서
이위발 시인 / 사바세계
너는 손가락 쥐고 태어나 손가락 펴고 죽듯이, 까무룩히 잦아드는 돌을 바라보는, 네 얼굴은 발가벗은 것 같았다. 발가벗고 있으면서 발가벗지 않았다고 말하는, 네 발밑에 땅이 움직이고 있다. 뱀을 밟았는지 흙을 밟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후벼 파듯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억센 들풀은 다리를 친친 감아 당기고, 날개 달린 곤충들은 응답 없이 날아와 깨물었다. 너는 국물에 빠진 머리카락이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네 것이라고, 내 것은 모두 네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하늘이 어디냐고, 하늘로 가겠다고 떼쓰는 것과 같았다. 소리로 태어나 소리로 살다 소리 없이 죽는다는 것을, 너는 시치미 뗀 채 눈을 감았다.
-시인동네 2018.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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