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이 시인 / 겨울 이사
송아지가 죽은 날 남편은 축사 뒷산에 올라 땅을 팠습니다 한 줌씩 구덩이가 열렸습니다 긴 혓바닥으로 새끼를 닦고 닦은 어미 소를 뒤로하고 볏짚에 싸인 입과 귀와 몸뚱이를 천천히 구덩이에 묻어 주었습니다 밤나무 감나무 쑥부쟁이 복숭아나무 미나리 씀바귀 들깨풀 냉이꽃 개미들 곁으로 송아지가 이사를 갔습니다
박송이 시인 / 나는 입버릇처럼 가게 문을 닫고 열어요
노출 벽에 오색 양말을 진열해 놓았어요 오세요 오지 않은 발들을 기다리는 일 이게 양말 가게 직원의 하루니까요
메트로놈 45BPM Largo를 켜 본 적 있으세요 느리고 고요한 박자가 이토록 우습고 쓸쓸해 보일 수 있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어요 온종일 양말들 곁에서 말이죠
누군가 한 켤레 혹은 열 켤레를 사 가기도 하고 천 원짜리 지폐들이 내 손에 쥐여쥐기도 해요
관객 없이 무대에 선 저 버스킹 맨은 이해할지 몰라요 동전과 시절을 맞바꾸는 기분을요
성게를 만져 본 적은 없지만 따끔한 맨발이라는 건 알 것만 같은 것처럼요
그래선지 저 산 능선이꼭 홍어 무침을 삼키는 것만 같아요 모든 게 기분의 문제겠지만요
라면 물이 끓고 있어요 이제 저 버스킹 맨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발꿈치를 사포로 문지른 잿빛 구름들이 딸 깍 딸 깍 잘도 흘러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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