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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수진 시인 / 수묵담채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2.

권수진 시인 / 수묵담채화

 

 

완성되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화선지에 스며든 붓이 걸어간 길을

붓끝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던

당신의 당찬 필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때로는 가파르게 획 돌아서는

붓선의 재빠른 손놀림 어디쯤에서

당신은 사라지고 말았지요

당신을 찾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허공 위에 휘영청 달이 뜨고

나는 어느새 기암절벽에 걸터앉은 신선이 되었네요

발아래 흐르는 강물 위로

나룻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노젓는 어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설마 당신 생각에 머무는 건 아니겠지요?

저 멀리 오막살이집 한 채도 보입니다

자연에 묻혀 당신과 함께 그리고 싶었던

하늘과 바람과 꽃과 나비와 총총한 별들의 향연

살다 보니 여백이 더 많았네요

 

 


 

 

권수진 시인 / 기호식품

 

 

가끔, 담배를 거꾸로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술잔을 치켜들다가

맥없이 술을

바닥에 엎지르는 경우가 있다

 

오늘, 신발을 거꾸로 신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 두둥실

저 멀리 사라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떠나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 식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배웠으니까

 

아프도록

 

 


 

권수진 시인

경남 마산에서 출생. 경남대학교 청년 작가 아카데미 1기 수료. 제6회 지리산 문학제 최치원 신인문학상 등단. 2011년 계간 《시작》 가을호로 등단.시집으로 『철학적인 하루』(시산맥사, 2015)가 있음. 공저 『시골시인-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