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진 시인 / 수묵담채화
완성되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화선지에 스며든 붓이 걸어간 길을 붓끝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던 당신의 당찬 필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때로는 가파르게 획 돌아서는 붓선의 재빠른 손놀림 어디쯤에서 당신은 사라지고 말았지요 당신을 찾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허공 위에 휘영청 달이 뜨고 나는 어느새 기암절벽에 걸터앉은 신선이 되었네요 발아래 흐르는 강물 위로 나룻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노젓는 어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설마 당신 생각에 머무는 건 아니겠지요? 저 멀리 오막살이집 한 채도 보입니다 자연에 묻혀 당신과 함께 그리고 싶었던 하늘과 바람과 꽃과 나비와 총총한 별들의 향연 살다 보니 여백이 더 많았네요
권수진 시인 / 기호식품
가끔, 담배를 거꾸로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술잔을 치켜들다가 맥없이 술을 바닥에 엎지르는 경우가 있다
오늘, 신발을 거꾸로 신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 두둥실 저 멀리 사라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떠나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 식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배웠으니까
아프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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