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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한 시인 / 메신저 장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2.

이길한 시인 / 메신저 장미

 

 

그림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꽃 중에, 장미가 있습니다.

 

4천원에 사 온, 두 송이 장미.

노란 장미는 그림의 모델이 되고.

다른 한 송이는 페트병에서 모가지를 내놓고 있습니다.

모가지라 하면, 동물의 목숨이 매달린 곳이겠지요.

영혼과 물욕이 분주하게 오가는 통로이겠지요.

모가지가 길수록 고고할까요.

 

모델이 되었던 장미가 수분이 날아가서 그림이 되었지요.

연분홍 장미는 연꽃처럼, 물을 이겨내지 못해서 시들었습니다.

시든 장미가 마르도록, 사나흘 거꾸로 매달아 뒀습니다.

수분이 날아가서 영혼만 남은, 장미가 되었습니다.

 

목숨의 영혼이, 수분일 것이라고 여겼었지요.

물이 생명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물오른 노란 장미가 그림이 되었지요.

남아있던 장미의 영혼이 시가 되었습니다.

옷을 입듯이, 초록 잎이 시작된 곳까지가 모가지입니다.

영혼이 된 장미의 모가지가 짧습니다.

 

 


 

 

이길한 시인 / 코끼리 2층

 

 

0의 이름이 땅바닥이다.

코끼리 발이 닿는 곳, 0이다

발을 떼어 놓을 때는 1에 도달할 수 없음으로

유럽 코끼리의 등이 1층이다

코끼리의 오장육부가 0이 된다

안쪽이 0이면 바깥이 1이다

 

반 고흐의 피부가 1이 되는 것이지

수많은 색감의 백색주의를, 면면 화려하게 기록했지

0의 뼈대가 건실하고, 흰색이 논리적이라서, 온갖 색깔이 얼굴에 있다

색의 삼원색을 맘껏 칠하고, 빛의 삼원색으로 샤워를 하지

삼원색을 쪼개고 또 쪼개며, 미지의 인종에게 무지개를 뿌렸지

반 고흐의 얼굴이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Over the rainbow

 

코끼리의 0과 1에 진흙과 하늘이 있지

미지의 인간에게 0이 없었는데

지금도 0이 없이 무지개를 볼 뿐인데

 

내가 코끼리 등에 올라앉으면, 2층. Over the rainbow

 

 


 

이길한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계간 《예술가》 2011년 가을호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서양화가로서 개인전 6회 개최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3회. 한국미술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