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숙 시인 / 사이를 말하다. 1
사이는 감정이 살고 있는 집 정말 예민해 입술에 검지를 대고 발꿈치를 들고 걸어야 해 와장창 소리가 들린다면 이미 틀어졌거나 틀어지기 쉬운 사이
꽃과 꽃 사이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듯 기분 좋은 사이가 되려면 꽃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해 바람의 결을 읽듯 꽃의 마음을 잘 읽어야겠지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냉정한 사람이 살고 있어 결과를 평가할 때 사이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끼워놓고 힘들었던 경우도 있어 그럴 땐 펼쳐놓은 일들을 혹은 사람들을 얼른 거둬들이거나 다음 장으로 넘겨주기도 해야 해 그래야 사이도 숨을 쉴 수가 있지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질투심 많은 사람도 살고 있어 꽃처럼 좋은 사람과 있을 때 봄처럼 신나는 일을 할 때는 사이를 확 좁혀버려 벌써 이렇게 됐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간이 엉덩이를 털지만
사이는 기억의 저장창고 어떤 사이가 됐건 어떤 사건이 됐건 되돌리지는 못해도 되돌려 볼 수는 있지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이 있듯이 이제는 맑은소리 나는 기억들로 사이를 충전하고 싶어
너와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겨울과 여름 사이에 봄이 있듯이 너와 나 사이에 봄을 끼워 넣고 싶어 시냇물이 흐르고, 새가 울고, 꽃이 피는 그런 봄
월간 『모던포엠』 2022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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