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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민경 시인 / 시간이 누워 자라는 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2.

2016년 겨울 <포엠 포엠> 신인상

박민경 시인 / 시간이 누워 자라는 밤

 

 

그건 슬픔의 지문이다

빗금 친 슬픔,

 

자꾸 스름으로 바뀌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불투명한 삶이 흐려질 때마다 어긋나는 손가락이 제멋대로 만든 모반이다 세모와 네모가 만나서 기형적 석상이 된 것처럼, 물비늘 두껍게 깔리는 어둠을 타고 빗자루가 하늘을 난다는 책에 빠져 오늘도 밤의 뼈대를 자른다

 

낡은 책갈피가 죽은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사각사각 활자를 갈아먹는 종이벌레의 얼굴이 커진다

슬픔이 스름으로 바뀌는 순간

허공을 유영하는 벌레의 눈

 

비밀을 열면 땅 속에서 몸통만 자란다는

마지막 열쇠 같은 라파 누이의 라노 라라쿠가 보이고

슬픔이 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 누워 자라는 밤

검게 그를린 당신의 눈 안전한가요?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

        귀 없는 얼굴을 잡고 묻는 모아이처럼

 

나를 향해 타인처럼 물음표를 던진다.

 

*라파 누이 - 이스터 섬의 다른 명칭

*라노 라라쿠-이스터 섬의 채석장

*모 아이 - 이스터 섬의 석상

 

 


 

 

박민경 시인 / 13월의 계단에 앉아

 

 

심해의 불고기를 닮은 사내, 비늘을 벗고

눈을 멀게 하는 말를 쏟아내었지

치욕으로 불든 시간은 갈라진 종이 위로 드러눕는 데

주름진 구름을 열고 나온 바람을 잡으며

사내의 열두 번째 애인이 푸른 이를 드러내고 있어

견고했던 꿈의 문 가볍게 열어젖히고

소금기 가득한 몸을 툭툭 털며, 환하게

 

이 땅의 새벽은 새가 울기 전엔 어두워

두꺼운 눈꺼풀 한쪽을 열면, 간밤 꿈속에서 달아나지 못한 나무속 벌레들이 손가락을 빨고 있지 허공에 걸린 책갈피를 열고 낯선 당신과, 서투른 눈인사를 하면 구름이 남긴 유서 같은 편지 한 장 읽을 수 있을까 헐거운 날 모퉁이에 걸린 등 굽은 나무의 눈동자 차갑게 떨리는데

 

낡아버린 자서(自序)에 비명 같은 눈물 고인 당신의 고백 듣고 싶어

오래 보다 더 오랜 동안, 역류를 타고 뒤돌아 온 말들, 남루한 몸을 열면 묽은 달빛을 먹고 자란 기억의 숲이 울고 있어, 쓰러지는 노들의 등으로 분열된 영혼의 직립보행을 보고 싶어, 나는 어둠을 재단하는 물까마귀처럼 앉아 기다렸지

검푸른 불립문자를 지닌 당신, 몽상의 마지막 페이지를

 

*루소를 생각하며 쓰다.

 

 


 

 

박민경 시인 / 그 여름, 몽환

-somnia , 꿈을 꾸다

 

 

우리들 체온은 한 번도 따뜻한 적 없어

눈꺼풀 닫힌 새장에는

작은 몸을 가진 팔목 없는 인형들만 비틀거려

 

어둠이 불러주는 노래는 마이너 라단조

숲의 정령를 원혈(月血)를 먹고 자랄 때

눈먼 새 한 마리 막 태어난 보름달 향해 뾰족한 울음을 날리지

숲길을 따라 매복하고 있는 문을 열면

죽은 나무들의 살피가 되살아나는 경계의 중간

이승에 환생하지 못한 혼(魂)들

바람이 놓고 간 휘파람을 모으고 있다

 

계단 없는 계단을 밟고,

다리 없는 다리를 밟고 건너가

 

입술 없는 벌레가 시간의 단물을 빠는 밤

휑한 눈을 가진 허공이 기다리는 곳에서

*애타타의 가면을 쓴 우리는 짐승의 후예

 

꿈에서 만난 꾸불꾸불 뒤틀린 *저(樗)

마디마디 홑겹를 뜯어 바람 신발을 만들면

범나비 떼 줄지어 배회하는 당신과 나의 썸니아

열에 들뜬 한 여름, 꿈속의 꿈이지

 

*저(樗) - 장자에 나오는 가죽나무

*애타타 - 장자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

*somnia - 꿈을 꾸다 (2인칭 단수 현재 명령)/ 라틴어

 

 


 

 

박민경 시인 / 그때, 자주색 꽃봉오리 가

 

 

그때 자줏빛 시든 꽃봉오리가 떨어졌을 뿐인데, 뭉긋한 바람이 잠시 불어왔을 뿐인데 계절 타는 새가 울음을 멈췄지 날지 못하는 새들의 이름을 적다가 알코홀로 흠뻑 문장을 적신 시인의 이름을 보았어

눈꺼풀 속에서도 꽃이 피고 어지러운 바람에도 중독되는 삶처럼 다리 아래 번져가는 흐린 강물들

 

생의 가장 따뜻한 기록은 어린 날 풀밭에서 시작되었지

깔깔거리는 발자국 소리

공기들의 가벼운 입맞춤

눈 그늘 같은 새 날개 아래 잔잔한 제비꽃 피고

기억은 새로운 정신을 가다듬고 땅거미 지는 길을 걷기 시작 했어

 

당신들과 젊음, 소녀가 식물의 계단을 차례로 내려와 분수를 만들고 여기에 제비꽃 이파리가 낙엽처럼 쌓이면 알코를 속으로 들어가는 지구가 보여 나는 보고 들었어 식물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삶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가시덩굴 휘돌아 촉수를 뻗으면 정원의 나무는 박새가 남긴 울음을 모아 길게 휘파람을 불었어 그건 먹지 못하는 열여섯 개의 물방울, 증발하지 못한 땀 같은 것

 

그때 자주색 꽃봉오리가 자라지 못하고 떨어졌을 뿐인데.

 

 


 

 

박민경 시인 / 미래일기

 

 

목격한 것만 기록했다

움직이는 사물의 존재는 비대칭적 인과율

내가 본 모든 것을 기록하는 동안

현재를 초월해 흘러갔다

 

돌아보면

생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지

혀끝을 통해 나간 말들은 먼지처럼 떠돌고

사랑한 것들은 건반 빠진 피아노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

어긋난 뼈를 가진 기억들이 유랑자처럼 떠돌아다닐 때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기록했다

지금 만전 불감증 환자같이 위태로운 나를

누군가, 그믐밤 달의 눈을 가진 야수처럼 훔쳐본다

 

속기되지 못한 문자들 어두운 눈물을 흘릴 때

시공을 지배하던 인과의 사슬은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혼돈의 가계(家系)가 적힌 시간의 기록 속

경고등이 깜박이고 마지막 에필로 그가 완성 되면

 

데드 앤드

 

시그널 플러그가 툭, 소리 없이 뽑힌다.

 

*미래일기 - 제 목: 애니메이션에서 차용

 

 


 

박민경 시인

부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불문과 졸업. 부산 가톨릭대학교 신학원 졸업. 2016년 《포엠포엠》 겨울호 신인상 수상. 2004년 제16회 가톨릭문예작품공모전 우수상 수상(시). 현재 포엠포엠 작가회, 詩詩동인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