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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서 시인 / 기린 울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1.

고영서 시인 / 기린 울음

 

 

기린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동물의 왕국에서

큰 나무 잎새를 말아 넣는 기린이

어딘가 기형적으로 보이는 것은

한 번도 그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함부로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길어졌을

 

'기린' 하고 부르는 혀끝이

자꾸만 안으로 치닫는 것은

방목할 수 없는 그리움이

내 안에도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석양의 지평선에서

음머- 하고 터뜨리고 싶은

그 소리의 가엾음으로

 

타는 노울

 

 


 

 

고영서 시인 / 서시천 코스모스

 

 

어느 봉기가 이리 아름다우랴

 

큰 물이 져서

큰 물이 져서

 

기르던 소만 떠 내려간 게 아니라

손때 묻은 세간살이

텃밭 푸성귀

파이고, 찢히고

무너지고 등등

 

잠긴 집의 온기가 돌아오기까지

한가위는 恨가위

 

넋놓고 하소연하려도

마스크부터 씌우고 보는

세상 아닌가

 

추운 여름이 한 순간에 흘러 갔고나

 

바람이나 쐬자 하고

터덜터덜 둑길 걷던

산동아짐

 

어디서 이런 존 냄새가 난다냐

숨 깊이 들어 마시고는

오매오매

이 기특한 것들,

징한 것들

금메 안 쓰러지고 피어나리라고

 

애지중지 손녀딸

볼 쓰다듬데끼 어루만졌다는

그 코스모스

 

일제히 손 흔들고 있다

함성 소리가

노고단을 넘어가고 있다.

 

- 계간 <창작과비평> 2020. 겨울호

 

 


 

고영서 시인

1969년 전남 장성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기린 울음』 『우는 화살』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 출간. 현재 광주전남작가회 이사.